My heartfelt story

내가 희망하는 관계

rejungna 2007. 6. 28. 14:29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물질과 물질 사이의 관계, 나와 연결된 모든 것과의 관계,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복잡하고도 귀중한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항상 옳은 choice를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다.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에는 "사이" 란 말이 있다. cm song으로 "우리 사이 좋이 사이 해태 사이다" 란 노래를 많이도 흥얼거렸었다. "사이"란 한 곳에서 다른 곳 까지의 distance, space 를 의미한다.

나는 가까운 사람들과 어떤 사이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 희망하는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첫째는 나에게 관심과 배려를 주는 관계이다.

나도 가족이나 마음에 와닿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족감과 연결을 원한다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배려를 해 줄 것이다. cry for help 하면 손을 내밀어 주고, cry for happiness 이면 함께 기뻐해주고, cry for loneliness 라면 함께한다는 동행감을 주고 싶다. 눈치를 못채서 못해주면 할 수 없겠지만, 관심에 적절한 양의 배려를 해 주어서 대상자가 이것을 느끼게 해주고도 싶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을 배려하고, 그의 소리에 귀를 귀울린다는 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self satisfaction을 만든다. 이런 관계는 나를 충만하게 할 것이다. 나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둘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는 진실함과 친밀감있는 관계를 갖고 싶다.

white lie 라는 말이 있다. 상황을 감안하여 상대를 위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accumulate 되어 치석 같아져 치아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이 된다면, 마치 우리 몸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만드는 DNA 의 mutation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mutated gene 이 몸 속에 생기면 세포들은 이에 적응하는 다른 성질의 cell 들을 만들기 시작하고, 몸 속의 주변 organ 들은 이 변모된 세포의 영향을 받아 기능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이러면서 세월이 흘러가면 이 모든 것들은 새 mechanism 을 형성하게 되어, 불행하게도 우리는 처음의 의도와는 너무 멀리 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관된 관계를 이끌다 보면 친밀감에서 스며나오는 행복감도 느낄 것이다. 상대방도 더 이해하게 되고, 연민의 정이건 사랑이건 마음을 붙잡아 매는 끈도 강해질 것이다. 그 끈을 통해서 나와 둘만 나눌수 있는 특별한 친밀감도 강해지고, 둘만 나눌수 있는 space는 더 넓어진다. 그러면 cushion 이 생겨서 어려움이 와도 잘 견딜 수 있게 된다. 그 반대라도 좋다. 친밀감 있는 따뜻한 관계라면 진실하고 싶을 터이니까. 

그러나 일생동안 내자신을 system 속에만 가두고 싶지 않다. 가장 가슴을 울리는 관계는 가슴 속의 지시대로 따를 때에 생기는 것이니까. 인생에서 한, 두번쯤은 그런 앞 뒤를 가리지 않는 spontaneous한 관계의 형성을 꿈꾼다면 어떨까?

 

셋째는 때로는 가늘더라도 길~고 긴 끈과 같은 관계를 희망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이들과 관계를 시작하고 끝내기도 한다. 또는 얼마간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영속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도 한다. 또, 어떤 관계는 다른 관계를 버려야만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한번 맺어진 그 끈을 죽을 때까지 끌고 갈 수 있는 특별한 관계를 꿈꾼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수한 고통을 인내한 것이며, 관계의 up and down의 위기를 가슴과 머리의 혼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것일 터이니까. 사랑하니까 제 갈 길을 간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밉고 싫으니까 헤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적 변명이며, 비겁자의 자기 최면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아사꼬와 갖으셨던 3번 만난 인연도 현세에서는 outdated concept 이다. 마음에 둔 관계라면 가끔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차가운 현실에 환영이 깨질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긴 끈과 같은 관계를 원할 때는 잘 살펴야 한다. 이으려는 끈이 내 영혼에 자양분을 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와도 의식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산다. 

하지만, 또 어느 누군가가 내 상처를 보듬어 주고 마음을 채워 준다면, 의외로 나의 다른 어려운 관계를 잘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다. 즉, 어는 한 곳에서 받은 상처나 상실감을 다른 관계에서 받은 energy로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힘과 energy의 지향이 일시적인 싸구려 만족감을 얻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기만이며 자기 가치의 상실이다. 

 

이처럼 이상적으로 상호 보완적이며 치유를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기는 아주 힘든 것이다. 이것이 쉬운 일이라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음의 고통 없이 불행과 행복도 모르고 밋밋하게 살아 가다가 죽을 것이다. 나에게 아름답고 소중한 관계란 인식이 됐다면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열 정도는 갖고 싶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관계의 싹틈을 희망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마치 바닷가에서 특별한 모래 한 알을 �아 내는 행운과 같기 때문이리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에게 여럿 있으면 좋겠다. 많아도 힘들 터이니까.

그리고 이런 좋은 사이가 오래동안  유지되면 한다. 중간에 끊어지는 것은 싫다. 새롭게 계속 다시 만들어 나가기도 힘들다. 그냥 편하게 있는 것 가지고 애쓰고 공들이면서 살고 싶다. 이제는 새로 시작할 나이도 아니니까. 그러면서 바로 그 관계가 창출하는 자양분으로 내 삶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내 옆의 다른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positive effect 을 주어 함께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