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참새와 석류나무
우리 집 뒷마당엔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석류나무는 감나무와 함께 우리 집을 대표하는 가을맞이 선봉대장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무에는 먹음직한 풍성한 열매 대신에 새들이 쪼아먹고 남긴 빈 껍질 뿐인 열매만
달려있는 것이다.
언제 부터인지 참새들은 마당의 두 마리의 진도개의 밥을 먹으려고 아침이면 날아오기 시작했다.
와서는 개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석류나무에 앉아서 후식까지 먹고 시끄럽게 떠들다가 날아가 버린다.
가끔, 아침의 참새 소리는 너무도 시끄러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서 쫓을 정도이다.
참새들에게 빼았겨버린 속 빈 석류들을 바라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삶의 마지막 기로에 서셨을 적에 "인생이 별 것이 아니다." 란 허무한 생각을 하셨던
친정 아버지는 3년 전인 2004년 9월 8일에 돌아 가셨다.
"아버지의 몸도 화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석류 열매같이 몸 속이 비었을까?"
이 세상에서 나의 최고의 우군이셨고 한 번도 나를 배반하신 적이 없던 분이셨는데,
전립성암으로 돌아 가셨다.
병원에 계시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정신력을 가지셨지만, 암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뵙고 LA로 돌아온지 한 달만에 연락을 받고 다시 분당 친정으로 나갔다.
병원에 입원하셔서 기운도 없고 온 몸에 퍼진 암때문에 심한 고통을 느끼시는 아버지 옆에서
어떤 표정으로 간호를 해야하는 지가 고민이 되었었다.
계속 눈물만 보여서는 않된다는 생각에, 미국식으로 아버지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암시를
전하고 싶어서, 어느 날 주무시다가 눈을 번쩍 뜨신 아버지를 보고 활짝 크게 웃었다.
"아버지가 아픈데 웃으면 어떡해!"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미안하고 민망해서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이 말을 못잊고 지낸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픔과 추억과 사랑을 남겨 놓으시고 내 생일 다음 날에 돌아가셨다.
동생에게서 제사는 돌아가신 전날 밤에 드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매년 내 생일 날 밤이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배려까지 해 주신 아버지가 고마웠다.
그러나 제사 날짜는 음력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생일 전날 밤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도 나는 계속 내 아이들에게 말한다.
"엄마 생일에 외할아버지 제사를 드린대!
너희는 엄마 생일날이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도 함께 생각해야되는거야" 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이곳서 내 생일인 9월 7일이면 아버지를 위하여 마음 속 깊이깊이 기도드린다.
"아버지, 사랑해요! 아주 많이요. 이제 좀 더 편안해지셨어요?"
아버지는 처음에는 친정의 선산이 위치한 수원 원천동 유원지 근처의 산에 모셔졌다.
선산이 광교 신도시를 조성하려는 정부에게 수용된 것을 아셨기에, 본인을 화장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발 밑에 숯을 많이 넣어서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셨다.
"아버지 같이 좋으신 분은 더 사셨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발 밑에 2 년간 지내셨다.
그러다가 엄마는 작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화장하신 후에 세 분 모두 이장하셨다.
과일 나무도 열매를 맺으면 사람과 동물들에게 제 몸을 바쳐 양식이 되고 힘이 되듯이,
우리네 인생도 사는 동안 자식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꿈도 주고 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그렇게 살다가 땅에 묻히고, 몸은 썩어서 대지와 한 동체가 된다.
서글프다면 서글픈 인생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마음과 영혼이 있기에 위로를 받는다.
마음으로는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할 수 있고, 우리 주위도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
영혼으로는 세상에 남기고 떠나간 것을 빛으로 계속 비출 수 있으니까.
이 가을의 문턱에 서서 나를 낳아주고 품어주신 부모님과 세상에 감사드린다.
"짧은 인생이지만 정말 살 가치가 있는 하루하루이지 않은가!" 라고 되내이면서...
Happy Birthday to me!
I miss you so, so, so much, father!
Please. be healthy and live long, mo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