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냉장고 비우기와 아침의 지진(LA)
뜨르 뜨르 뜨르...
전화 벨 소리에 자동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든다. 안에서는 서울 사는 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흘려나오고 있다.
“애들이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LA에 도착할꺼야. 그리고 3 일 지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3 일을 지낸 후에
다시 LA 로 와서 이틀 밤을 자고 뉴욕으로 떠났다가, 일주일 후 아침에 다시 너희 집으로 돌아와.
그리고, 그 다음 날 밤에 다시 서울로 돌아올...”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구 애들의 우리 집 방문 이야기인 것은 같은데... 언제 와서 언제라구?
눈을 크게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24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머리 회전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친구는 나의 어눌하고 헤매는 목소리에 시차 차이를 알아챘는지,
LA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깨워서 미안하니 다시 전화를 걸겠다면서 재빨리 끊어버린다.
시작처럼 동의도 구하지않고 끝나버렸다.
나는 이제 정신이 들어서 복잡한 산수 계산도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는데...
그런데 애들은 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지? 나보고 LA 공항서 계속 pick-up과 drop-up 을 하라는 말인가?
참, 서울 사람들은 가끔 염치도 없이 계획을 짠단 말이야.
다시 침대에 누워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해보지만 의식이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 채로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만이 내 동무가 되어버렸다.
반쯤 열어놓은 두개의 창문 밖에는 커다란 나무들의 머리만 희미한 빛에 반사가 되어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 시커먼 덩어리로 보인다.
방 안의 낯익은 가구들은 어서 하던 일로 빨리 돌아가라고 숨을 죽이며 웅크리고 있다.
알았어. 나도 원상복귀 시키려고 애많이 쓰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의식을 모으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않되겠네. 제멋대로 널띄기를 시작한 호르몬 때문인가보다!
나이 들어가니 내 뜻대로 내 몸과 마음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듣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불현듯...
어두운 정막감,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이 세상에 나 혼자인 듯한 외로움이 엄습한다.
고개를 돌려서 침대 반대쪽 끝에 저쪽을 보고 길게 누눠서 고른 숨을 쉬면서 잠에 취해있는 남편의 모습을 본다.
잠이 많은 딸은 뒷마당에 있는 자기 방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고,
의대 2년을 마치고 LA 에서 시험 step 1을 치루기 위해서 월요일에 동부에서 온 아들도
건너 편의 자기 방에서 꿈나라에 완전히 잠입해서 하루종일 볶은 무거운 머리를 쉬고 있을 것이다.
모두들 편히 쉬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뒤척이어야만 하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빠져나와서 아래 층으로 내려가면서
매마른 오래된 나무 계단의 삐꺾거리는 소리를 최대한으로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소파에 앉기 전에 창 밖을 잠시 바라본다. 거리에 외롭게 서있는, 배가 불룩한 전등을 뽑내고 있는
가로등 덕분에 앞마당은 제법 밝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3 시 반이다. 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아휴! 아침이 밝으려면 아직도 한참 더 기다려야 하는데… 아침에는 생골치가 아프겠지.
병원도 가고 할 일도 많은데…
희미한 빛 속에서 능숙하게 자리를 잡아서 소파에 앉으니 쓰잘데 없는 것들이 다 머리 위로위로 올라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한밤 중에 웬 생뚱한 질문은?
어두워져도 작은 빛을 투영할 수 있는 투명한 영혼을 갖고 싶다고 소망했었고,
죽는 날까지 한점 후회없는 열심한 삶을 살겠다고 말해 왔잖아.
아직까지 내 영혼의 뒤를 닦아주는 사람이 있다고 믿지만, 영혼은 탁해지고 후회스러운 것도 많은데...
생각해보면 참 열심히 정신없이 살아왔다. ㅎㅎ
그러나 최근 2,3 년 동안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참 힘들어 했다.
공허함과 허무함에 가슴앓이를 했다. 무조건 마음을 비우면 되는 것을...
무한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보면 변질된 세포같이 돋으라져 나온다.
냄새나고 죽어가는 세포는 공포와 불안에 떨게하고, 낫고 싶은 욕심에 발버둥 치게 만든다.
길이 아니어서, 잡히지 않아서 오는 상실감은 영혼의 색을 퇴색시키고 외로움에 침수시켜 버린다.
아무리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삶의 길이 있는 것처럼, 다 열어보일 수 없는 것 처럼,
스스로 만든 통제 제한 구역에 갖혀서 더 고독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억지로 변명을 하자면, 원천적인 고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들수록 기억 속의 창고에 쌓이는 물건이 많아져서 잠못이루는 오늘 같은 밤에도 심심하지는 않다.
오늘은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 제일 먼저 터져 나오려고 한다.
아~~ 이제 그만 하자. 끝도 없다. 아침이 되면 눈이 멀똥햇던 이 밤을 후회할터인데.
family room 으로 가서 텔레비젼을 킨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서없이 꽉찬 냉장고 두개의 문을 차례로 열고 윗칸부터 하나하나씩 들어내면서 비우기 시작했다.
생각과 마음을 내 영혼에서 털어내 듯이, 냉장고 속의 시들은 야채와 건드리지도 않는 반찬들을 밖으로 꺼낸다.
냉장고에게 여유를 주고 싶다. 속의 공기가 회전하고 새로운 필요한 물건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주고 싶다.
냉장고 하나는 김치, 반찬용으로 내가 요리를 해야 먹을 수 있는 재료들로 채워져 있다.
다른 냉장고는 과일과 음료수용으로 요리를 하지 않아도 그냥 꺼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채워져있다.
큰 통의 남은 음식은 작은 통으로, 사용치도 않는 낯설은 소스들은 쓰레기 통으로,
자리를 못잡은 야채들은 잘 싸서 가지런히 눕히고, 변색된 과일들을 골라 깎아서 통에 넣고,
음료수들은 날짜를 확인하고, 보관해둔 약들의 용도도 다시 살피고,
냉장고의 벽과 바닥, 문과 서랍 속은 쑤세미와 행주로 반짝반짝하게 닦아낸다.
점점 비어가는 냉장고 속 처럼 마음에도 빈 자리가 생기면서 시원해지고 있었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힌다.
이마의 습기가 많아질 수록 부엌 창밖의 빛도 힘을 더 내기 시작한다. 마침내 완전히 밝아졌자.
아직 오전 6시 이니까 40분 정도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몸을 쉴 수가 있다.ㅎㅎㅎ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여유가 여전히 있다는 것이 이제는 기쁨이자 희망으로 바뀐다.
이미 full house 인 집이 며칠 후에는, 친구의 세 딸 덕분에 더 꽉 찰 것이다.
그래도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니 좀 더 편하게 천천히 갈 수 있을 것 같다.ㅎㅎㅎ
나는 이렇게 오늘 하루의 문을 또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열겠다고 다짐한다.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잡다한 것으로 채워진 마음도 지속적으로 비워가면서 힘차게 걸어가야겠다.^^
그런데... 아침 11시 40분경 LA 에서 5.4 의 지진이 발생했다. 흔들 흔들~~~~~ 꽤 길게, 강하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내 머리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밤에 잠을 못잤더니 몸이 흔들리기 까지 하는구나!
아니, 지진이다! 무척 놀래서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고, 또 여기저기에 전화를 해본다.
참,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세상에 살고있구나! 그러니까 마음을 더 비워야하나 보다.
지진의 진원지(epicenter) 가 LA downtown 과 아주 가까웠다.
건물 밖으로 놀란 가슴을 안고 나온 downtown 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