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eartfelt story

추석에 즈음하여 한밤에 아버지께 띄우는 추모 편지

rejungna 2010. 9. 14. 09:39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를 제외하곤 쥐죽은 듯이 고요한 밤입니다. 지난 주에 아버지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아시지요?

가을이 오는 문턱에서 잠시 지난 시간을 회상하면서 아버지께 편지를 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6년 전인 2004년 9월 8일

오후 4시 30분에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암균이 파고들어가 퉁퉁 부은 몸뚱이 안에서 아버지는 몹씨 고통스러워 하셨지만,

저는 아버지와 더 오래도록 지상에서 함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애많이 쓰셨지요. 그리고 미지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남몰래 몸부림을 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강한 정신력, 젊음과 정성으로 40대 중반에 아버지를 덮쳤던 암을 이겨내신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70대 초반에 아버지를 삼켜버린 또 다른 침입자에게 우리 모두는 손을 들고 말았지요. 하지만 저는 알아요.

그 지독한 놈도 아버지 정신과 영혼마저 빼았지 못했다는 사실을요. 건강하신 덕분에 너무도 빨리 아버지의 육체을 잠식했던 균은

결국 아버지와의 헤어짐을 만들었습니다. 적어도 남아있는 제 생명 길이 만큼의 이별을요.

 

가신지 벌써 6년, 이제 제 마음이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그토록 아프게 가슴을 찌르던 날까로웠던 긴 칼은 작은 꼬챙이로 변했습니다.

생각하면 울고 말하면 울고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에 울고 아버지와 관계된 어떤 것을 보거나 연상이 되면 울곤 했습니다.

눈을 막 감으신 아버지에게 부끄럼없이 큰 소리로 약속한대로 부녀간의 인연을 영원히 잊지않으며 오래된 기억을 어제의 기억같이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삶을 산다는 핑계로 배가 고프면 밥도 먹고 기쁘거나 즐거우면 웃으면서 지난 6년을 보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순응하는, 무덤덤한, 현실적인 딸일 뿐이었습니다.

 

저에게 큰 사랑을 주셨고, 무조껀한 인정을 주셨으며, 딱히 해드린 것이 없는데도 딸인 그 자체로 기쁨을 주었다고 도리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태평양 만큼 떨어져 살고 있지만 가끔 뵈었던 탓에 출가한 딸이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많이 저장하고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몸의 변화를 알아보지 못한 죄, 내 가족과 내 문제에만 심취해서 항상 괜찮다고 하시던 말씀을 내 편한대로 쉽게

믿어버린 죄, 우리 삼남매가 잘 살도록 치밀하게 준비를 하셨건만 가시는 마지막 시간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 죄, 딸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마름을 축여드리지 못한 죄, 가족간의 화목을

인생 좌우명으로 삼고 자식을 교육하셨지만 각자 제 가정을 이룬 탓인지 아픈 아버지 마음보다는 육신이 멀쩡한 우리의 이익을

앞세운 죄... 늦었지만 자주 돌아보며 반성하고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2004년 1월 말의 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에 구정 겸해서 일이 있어 한국에 나갔습니다. 그리곤 아버지의 병에 대해서

처음 알게되었지요. 돌이켜보면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사람처럼 아버지는 조상님께 올리는 마지막 제사를 온 정성을 다해서

드리셨습니다. 제사상 차리기가 힘드니 이제 그만 큰아들에게 제사를 넘겨주자는 엄마를 아버지는 계속 설득하고 계셨습니다.

아직은 건강하신 아버지가 지내야 정성스레 조상님께 차례를 지낼 수 있다고요. 살아계신 한 본인이 직접드리고 싶다고요.

나는 그 때에 내가 딸이기 보다는 아들이고 싶었습니다. 왜 딸은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조상님들,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크신 분이셨습니다. 정성을 다하는 제주의 경건한 모습을 지켜보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매게되고 아버지란 사람이 새롭게 보이곤 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하늘서 조상님들께 차례를 지낼 필요 없지요? 그 분들과 함께 계시니까요. 긴 세월의 그리움을 채우셨는지요?

돌아가시면 자식들이 묘지를 건사하는 것이 힘들다고 꼭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수원의 가족묘지에 잠시 계셨다가 지금은 용인의 남서울 공원에 누워계십니다. 양지바르고 풍광이 좋고 바람 소리가 들리는

사방이 탁트인 곳입니다.  그 곳에 가면 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xxxx, 왔구나. 먼길을 와주었구나! 고맙다...

잊지않고 찿아와서."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를요.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지금도 영정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성격처럼 한결같으신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그 곳에서 저는 아버지 방에 기거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합니다. 책장에서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들을 꺼내 보기도 하고 

서랍 속의 사무용품을 만지기도 합니다. 엄마는 말씀하시지요. "네 아버지는 딸 하나는 확실하게 키웠으니 행복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저에게 주셨던 행복에 비한다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딸로서 인생을 잘 살도록 계속 힘을 주세요.

 

 

 

돌아시던 해 3월에 찍은 모습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 집 거실에 서계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날 아버지는 저와 은행에 가시기 위해서 외출 준비를 하셨지요. 천천히 바지를 갈아 입으시고 자켓을 입으신 후에 모자를

쓰셨습니다. 제가 미국서 사온 모자를 쓰면서 딸이 주었다고 좋아하셨지요. 약간을 길다고 하시면서요. 한달 전에 받으신 방사능 치료

때문에 많이 힘드셨지만 암균을 퇴치한다는 희망을 품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화사하게 웃으면서

아파트를 나왔습니다. 약해진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서 한 손으론 지팡이를 짚으시고 다른 한 손은 저를 붙들고 천천히 걸었지요.

은행서 일을 마치고는 분당 중앙공원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곳까지 가실 수 없었지요. 대신에 동네 공원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따스한 봄빛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처럼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어느 봄빛 보다 더 따스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은 심상치 않은 상태를 넘어서고 있었지요.

 

아직도 아버지께 당신의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큽니다. 하지만 의사인 큰동생이 강하게 

반대하였고 저 역시 아버지의 희망을 깰 용기가 없었습니다. 겁장이였지요. 실제로 아버지의 상태를 정획히 알지 못해 반신반의

하는 상태였었고 적어도 일년 정도는 더 사실 수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 사진을 찍으신지 꼭 6개월만에

떠나셨습니다. 남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표현치 않으셨지만 꼭 살고 싶어하셨던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건강해지면

미국의 우리 집과 스위스 융프라우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폭포를 다시 방문하고 싶다고 하셨었지요. 저는 점점 쇠잔해지는

아버지를 보면서 당신의 백과사전 같은 기억력이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아버지 두 손끝에서 말끔하게 풀어지는 명품 글씨도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구성지게 한 가락 뽑으시던 그 노래 솜씨도 너무 아까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가운 이를 보시면 마음 속에서

터져나오는 빙그레 미소가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순간에 한줌의 재로 되었지요.

 

이제 아버지는 가셨지만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을 남기셨습니다. 모두들 확고하게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버지의 꿈의 발자국을 따라서 걷고 있는 듯합니다. 미국을 너무도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저와 막내 동생 가족은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딸로 자랐다는 것이 참 기뻐요. 아버지와의 인연은 지상 최고의 인연입니다. 아버지를 회고하는 이 편지를 쓰는

제 가슴은 찡하고 뭉클하지만 한편 다시금 충만해집니다. 곧 다가올 추석 명절에 아버지의 안식처를 찿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

시간도 가고 인생도 가고 한 세대가 무너졌지만 기억은 남습니다. 그립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어요. 

 

2004년 구정 때에 저와 함께 외출서 돌아오다가 지하 주차장에서 한장을 찍었습니다.

그래도 사진이 남아 있어서 참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