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50주년의 영원한 여우 마릴린 몬로 Marilyn Monroe
8월 5일은 Marilyn Monroe(마릴린 몬로)가 타계한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1926년생이니까 아직 살아있다면 86살이다.
생전에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다가 죽은 이들도 많고 오히려 죽은 후에 더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적지않다. 하지만 몬로만큼
삶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대중에게 여전한 호기심을 일으키고 변치않는 사랑을 받으며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의 지존으로 남아있는
여배우는 흔지 않다.
8월 5일은 Marilyn Monroe(마릴린 몬로)가 타계한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라고 한다. 1926년생이니까 아직 살아있다면 86살이다.
생전에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다가 죽은 이들도 많고 오히려 죽은 후에 더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적지않다. 하지만 몬로만큼
삶이나 죽음과 상관없이 대중에게 여전한 호기심을 일으키고 변치않는 사랑을 받으며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의 지존으로 남아있는
여배우는 흔지 않다.
왼쪽 위는 몬로의 사후에 첫번째로 출간된 자서전으로 그 유명한 소설가 Norman Mailer 집필로 1973년에 발간되었다.
그는 책에서 몬로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FBI와 CIA 에 의한 타살이라고 말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른쪽 위는
2012년 7월에 발간된 가장 최근의 자서전으로 USC 대학 교수인 Lois Banner 가 몬로를 성공한 여자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몬로는 1926년 6월 1일 Norma Jeane Mortenson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생아로 LA 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여러군데 기탁부양가정
(foster home)을 전전하면서 성장했다. 맡겨진 집에서 성적 학대를 받기도 하였고,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엄마는 남편과
버지니아주로 이사가면서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몬로를 동네 이웃의 아들과 결혼시켰다.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
겨우16살에! 남편이 이차 세계대전 중에 군복무를 하는 동안 몬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어는 사진사의 눈에 띄었다. 그의 권유로
모델 에이젼시에 등록했으며 성공을 위해서 머리를 갈색에서 금발로 염색했다. 얼마 후에 그녀는 소속 에이젼시의 최고의 모델로
성장했고 이어서 20세기 폭스사 사장의 눈에 띄었다. 강한 인상을 받은 사장은 Norma Jeane 이라는 이름 대신에 Marilyn Monroe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48년에 Columbia Pictures 로 옮긴 몬로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을 하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노래,
춤과 연기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1949년에는 단돈 $50을 받고 누드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50년 부터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54-1957년 사이에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왼쪽 위 사진은 데뷔하기 전 1947년의 사진이며 오른쪽 사진은 배우로 상당히 알려졌을 때인 1953년 모습이다.
몬로는 뉴욕 양키스의 센터 필더로 야구영웅이었던 Joe DiMaggio 와 1954년 1월에 두번째의 결혼을 했지만 같은 해의 12월에
이혼했다. 영화 'The Seven Year Itch' (7년만의 외출)에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 몬로가 뉴욕의 지하철 환기통
위에 서있는 장면이 나온다. 지나가는 지하철 바람은 공기통을 빠져나와 그녀의 하늘하늘한 흰색 드레스를 속옷이 보일 정도로
날린다. 촬영 현장에 있던 남편 디마지오는 화가 치밀어 그 자리를 떠났고 결국 몬로와 이혼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아끼고 도와주고 사랑하는 남자로 남았다. 몬로는 그 후 1955년에 당시 최고의 연기 지도자인 Lee Strasberg 에게 사사받고 연기력을
더욱 키웠다. 스트라그버그는 그를 거쳐간 수백명의 제자 중에서 최고의 학생은 Marlon Brando 이며 두번째의 학생이 몬로라고
극찬을 했다. 그녀가 1957년에 당대의 최고의 극작가인 Arthur Miller 와 세번째의 결혼 발표를 했을 때에 사람들은 '최고의 지성과
백치미가 결합한다.'고 비웃었다. 실제로 이들은 정신적으로 서로를 고갈시켰으며 육체적으로도 병들게 했다. 두번의 유산 끝에
몬로는 정신과 상담도 받았고 자주 심하게 앓았다. 그녀의 성격은 점점 기복이 심해져서 함께 일하기 힘든 동료배우라는 원성을
샀다. 결국 두 사람은 별거를 거쳐 1961년에 이혼을 했다.
in 1949 in 1953
1960년 부터 몬로는 병으로 자주 입원을 했다. 점차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이를 견디기 위해서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알코올과 처방약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졌다. 점차로 영혼을 잃어버린 a lost soul 이 되어 일에 대한 열정도 식고 삶에
대한 회의도 깊어갔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을 지치도록 기다리게 만들었고 예측불가한 사람이 되었으며 뭔가에 쫓기는 듯이
절박하게 살았다. 이 시기에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 동시에 교제했으며, 죽기 두달 전에 뉴욕의 Medison Square Garden 광장에서
있었던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서 유혹적인 목소리로 축하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1962년 8월 5일 새벽에 그녀의
주치의는 싸늘한 나신을 발견했다. 몬로는 배우로서의 능력도 인정을 받아 1961년에는 Golden Glove Award 를 수상했고,
1962년에는 Directors Guild of America 상을 받았다.
in 1953 unknown when
in 1949 in 1956
마릴린 몬로는 불운했던 성장기를 극복하고 눈부신 신데렐라가 된 여성이다. 금발, 백치미, 우수, 장난기어린 목소리, 그리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모습으로 만인의 여인이 되었다. 뭇남성들의 연인이어서 행복했지만 한 사람에게도 진정으로
이해받거나 사랑받지 못했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 드라마틱하게 삶을 마감했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은 내면을 감당 못하고
자신을 포기한 여배우다.
in 1954
몬로의 이름은 타계 50주년이 되는 올해에 특별하게 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올려지고 있다. 너무 파해쳐져서 더 이상 나올 것
없는 생이지만 대중들의 관심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현재 트위터 팔로우가 53,000 명, 페이스북의 팬은 삼백만이 넘는다.
The LA Times 신문에 의하면, 우리는 앞으로 그녀의 모습을 더 많은 곳에서 볼 것이고 그녀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꺼지지 않는 그녀의 인기를 이용한 마켓팅이 점점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로 변화된 삶을 산 덕분에 미국에서
죽은자로서 마이클 잭슨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이어서 세번째의 고소득자이다. 개인적으로 죽은 후에 까지 돈을 버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어쨋든 그녀가 소장했던 보석과 장신구는 모양 그대로, 신었던 신발은 현대식으로 바꾸고, 애용했던 화장품은 현대적 감각에
맞추어서, 그녀의 스타일은 새로운 패션으로 재창조되어 우리에게 올 것이라 한다. 이미 그녀의 이름이 들어간 와인은
출시되었고, 영화 장면 속의 모습대로 조각한 거대한 동상은 팜프링스에 서있다. 가장 야심찬 기획은 몬로가 방문하면
편히 쉴 것 같은 카페와 스파를 전국적인 체인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몬로의 사망 50년을 맞이해서 일련의 추모 행사가 계획되고 있다. 팜프링스에서 영화제가 열리고, Hollywood Museum 은
그녀의 소장품 전시회를 한달간 연다. 관람객은 몬로가 영화 속에서 입었던 옷들을 감상할 수 있다. 그녀가 묻혀있는
Westwood Memorial Park 에서는 5일 낮 12시에 추모제가 열린다. 이외에도 라스베가스의 시저 팰리스 호텔의 화랑은
Andy Warhol 이 실크 스크린 위에 그린 몬로의 10개 초상화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나도 이 기회에 언제 어디서 어느 방식으로 만나도 아름답고 싱싱한 미소를 지닌 마릴린 몬로를 다시 추억해 본다.
그러면서 그녀의 영혼이 하늘서 편안히 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