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미국 최초 한인 여기자인 카니 강씨의 추모

rejungna 2019. 8. 27. 13:25

[추모의 글] 한인사회의 진정한 대변자

 

[LA중앙일보발행 2019/08/21 미주판 17 (발표된 글입니다)


4.29 폭동을 겪은 사람들은 안다. 주류사회에 우리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얼마나 처량하고 

가슴 아픈지를. 하지만 그후 LA타임스에 카니 강(Connie Kang) 기자가 근무하면서 한인들의 현안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전해 주었다. 그녀는 LA타임스가 폭동 후에 한인들에 관한 기사를 폭넓게 다루기 위해 영입한 미국 최초의 

한인 여기자였다.


                        4.29 폭동 시의 한인들의 피해 상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주류 언론은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 4명의 무죄 판결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임에도 마켓 주인 두순자씨가 

오렌지 주스를 훔친 흑인 소녀와 우발적으로 몸싸움하다가 숨지게 한 사건이 폭동의 기폭제가 된 듯이 한흑 갈등으로 

보도했다. 표적이 된 한인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LA타임스 오피니언 면에 기고를 했던 사람으로서 

카니 강씨의 출현과 활약을 기억한다. 부고를 접하니 그녀의 보도와 칼럼을 열심히 읽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카니 강 기자 (1942~2119) 


카니 강 기자는 1992년 가을부터 2008년까지 LA타임스에서 주로 아시안 커뮤니티의 소식을 전했고 후반에는 종교를 

담당했다. 1942년 북한 태생이며 그녀가 3세 때 가족이 종교 문제로 남한으로 피란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 1월에 

부산으로 재차 피란 갔고,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의원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얻은 후 

오키나와의 외국인 학교에 재학하면서 영어에 빠져들어 미국서 신문기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미주리주 대학 

저널리즘 학사와 노스웨스턴 대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63년에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미국 주류 신문의 첫 아시안 

여 기자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 이그제미너에서도 근무했다. 2008년 후에는 신학을 공부했고 

장로교 목사가 되려고 했다

 

               1988~1989년 - 카니 강 기자가 San Fransisco Examiner 서울 지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카니 강 기자는 LA 한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주류 사회가 모르는 우리들의 속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었다

아픈 한국사 외에도 마켓과 리커스토어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한인들의 애환을 보도했다. 6.25의 숨막히는 

진격과 후퇴와 피란 이야기, 2차대전 중에 징집돼 강제노동을 했던 일본 우토로에 사는 한인들 8가족이 집의 

강제 퇴거됨에 미국의 도움을 얻으려고 평생 모은 돈 2만 5000달러를 갹출해서 뉴욕타임스에 광고낸 이야기

한인들의 교육열폭동 후의 한인들의 생각과 삶의 변화 등등이 그녀의 손끝에서 글로 변해 남겨졌다


카니 강 기자는 이민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한인들의 진솔한 생각을 알리고 싶어했다. 그녀의 글은 힘없는 

한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이름을 주었다. 우리의 실상이 그대로 담겨진 그녀의 기사를 읽으면 옛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카니 강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