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snow)에 녹아든 Idyllwild 여행
Idyllwild(아이들와일드)를 다녀왔다. 샌 버나디노 카운티에 자리잡은, 팜스프링스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산속 마을이다. 7,000 피트 정상에 오르면 앙증맞은 빌리지가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닫힌 도시의
상점들과는 달리 빌리지의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열었다. 하지만 꼭 다시 찿고 싶었던 식당 문은 아니었다.
이번 아이들와일드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은 빌리지 주변에 눈에 띄게 안띄게 예쁜 집이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소나무 통나무로 건축한 cabin들인데 겉으로도 현대적인 멋진 집들이었다. 거주 인구가
적지 않은 사실과 그 높은 산에 건축 재료를 운반해서 집을 지은 수고함에 놀랐다.
현재 미국에서는 북극발(發) 겨울 폭풍 추위 때문에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의 4분의 3이 (70%)
눈에 뒤덮였고, 주민 2억명에게 경보가 내려졌다. 눈 구경 하기 힘든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아칸소주 등
남부 지방까지 눈으로 마비되었고 인명·재산 피해 역시 크다. 거기다 긴 정전이 지속돼고 있다. 빨리
복구되어서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사람들이 정상 생활을 되찿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 계절 동안 큰 변화없는 밋밋한 날씨를 가진 LA에 사는 나는 '눈내리는 광경을 본다'는 자체를 행운으로
여긴다. 그런 행운을 아이들와일드에서 잡았다. 그러니까 벌써 서너 주 전이다. 집에서 3 시간 거리인데
열심히 달려서 두 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딸이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는데 산에는
눈이 올 지 모르니까 두꺼운 옷을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 마침, 이틀 먼저 도착해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에게서 같은 내용의 문자가 왔다. "지금 아이들와일드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어요. 산길을
조심해서 운전해서 오세요."
하지만, 그렇게 오랬동안 함박눈이 올 것은 기대 밖이었다.
동쪽으로 달리는 10번 프리웨이를 빠져 나와서 시골 길로 들어서며 243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정말
눈발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눈과는 반대로 내 기분은 고조되었고, 창밖에서 사방으로 뻗치는 눈발이 마치
동화의 나라로 들어선 기분을 주었다. 달리는 좁은 도로 아래에서 따라오는 깊고 깊은 계곡의 저 만치에는
딴 세상인 누런 도시가 보였다. 고도를 향하여 자동차는 용감하게 달렸고, 고도의 끝인 아이들와일드는
소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소나무 뿐이다. 키가 작고 크거나, 가지가 많거나 적은 차이
뿐이었다.
그렇게 오전에 만난 눈은 오후 내내 멈춤없이 왔고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다음 날 오후에 하산하기 전까지
내렸다. 눈 송이는 점점 더 커져서 앞이 보이지 않았고 세상은 호령하는 눈에 꿈쩍 못했다. 하얀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함박눈은 길에 하얀 점을 찍지만 점으로 남지 못하고 무엇이든 이불처럼 고르게 덮어주었다.
검은 색 모자 위에는 하얀 층이 겹겹이 만들어졌고, 외투의 어깨는 무겁다 못해서 처연하고,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눈 위를 걸어보고, 눈 덮힌 마당에서 뛰어보고, 발끝에 힘주면서 계단을 오르내리고, 눈싸음하는 손자들
옆에서 눈덩이를 만들어주고, 차를 덮어버린 두꺼운 눈을 애써 치워보고, 커다란 눈송이에 짖눌린 나무의
가지를 가만히 흔들어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추억을 어린 시절의 눈 추억과 연결시켜도 보고, 창가의
의자에 앉아 밖을 응시하며 뜨거운 차를 마셨다. 실제가 아닌 꿈 속의 세상 나들이 같았다. 일생에 한 두 번
뿐일 지도 모르는 한박눈과의 밀애를 진하게, 진심으로 즐겼다.
숙소는 통나무로 지은 캐빈(cabin)이었다. 아들 친구의 소유라는데, 보통은 Air B&B로 임대를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비어있다고 했다. 눈만 봐도 감지덕지한 여행인데 눈 덮힌 산속의 캐빈에서 하루를
머물은 것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작은 앞채 옆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본채가 보인다. 계단과
구름다리로 숙소 두개는 연결됐다. 본채에는 커다란 부엌과 긴 식탁, 거실, 방과 화장실이 두 개씩, 또
거실은 이층에 하나 더 있다. 돌로 만든 벽난로 위를 사슴 뿔로 장식해서 전형적인 미국적 캐빈 분위기다.
앞채는 원래 차고였는데 로프트 스타일의 숙소로 개축했다. 아래 층 방에 붙박이 벙크침대가 4개나 있다.
우리는 낮에는 본채에서 지내고 잠은 앞채의 위, 아래 층으로 나누어서 잤다. 매몰찬 바깥 추위에도
감사하게 뜨끈한 난방이 몸을 녹여주고 샤우어 할 때는 청량하고도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아아~~ 눈에 파묻혀 멋지고 행복한 하루+ 시간을 보냈다.
초록 상록수로 눈을 보듬고 시린 손을 비비면서 코로 맑은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행복은 컸다.
소나무가 여기저기 서있는 마당이 넓다. 손자들은 신나서 썰매도 타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 싸움을 했다.
지치지도 않는다. 6살 짜리 손자는 눈을 난생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눈의 크기가 작은 것에 놀랐다고
한다. 눈은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LA와는 다른 세상에서 잠시 거기가 진짜 세상인 듯한
착각을 했던 것도 재미있다.
이틑 날 아침에 한박눈을 맞으며 동네 빌리지로 내려갔다.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중심가 까지 도달할 수
있는 적당한 산보 거리였지만 몇 걸음에 미끄러져서 자동차를 탔다. 고마운 것은 어제 밤부터 제설차가
여러 번 집 앞을 지나갔던 것이다. 아들이 집 앞 드라이브웨이의 눈을 치우는 것을 본 제설차 운전사 아저씨는
우리가 나갈 줄 감지하고 집 앞을 한 번 더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집 앞이 언덕이고 골목길 끝에 가까워서
보통 그 위 까지는 오지 않는 것 같았는데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Idyllwild 는 오랫 동안 내게 아주 좋은 곳으로 남아있던 여행지다. 이 곳을 마지막으로 찿았던 시간은
여러 해 전의 초가을이었다. 동네 빌리지는 사시사철 언제나 예쁘다. 작은 가게들과 식당들이 나란히 벗한다.
모든 건축 자료는 통나무인 탓에 목가적이다. 에브라함 링컨이 살았던 시대의 통나무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지만 그래도 옛시대를 상상하게 한다.
이제 아이들와일드에 대한 추억이 더 무거워졌다. 2021년 1월에 눈, 맑은 공기, 소나무, 깨끗한 물, 맛있는
커피, 인상적인 캐빈이 커다란 행복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