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에 한국에 와서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엄마는 내가 오기 전에는 사우나의 더운 물에서 나오신 후에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져서 왼쪽 뒤통수를 다치셨었고,
(이 때는 그리 심하지 않으셨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성당 노인학교에서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두개를 더 남겨두고 평소 힘없는 오른쪽 다리가 헛딛는 바람에
쿵소리와 함께 돌바닥 아래로 굴르면서 오른쪽 뒷머리를 부딪쳐 모자를 쓴 것 같은 커다란 혹을 만드셨다.
응급실로 실려간 엄마가 병실을 잡은 후로 꼭 4일간을 밤낮으로 좁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다가 어제 엄마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올케는 나처럼 미국에 살고 큰 올케는 시어머니가 입원해도 전화도 하지않는 간이 큰 사람이기에 간호는 당연한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정수리의 오른쪽 부분이 붓고 피딱지까지 앉았으니 골은 깨질 듯이 쑤시고,
CT 검사에 나타난 목뼈는 앞으로 밀려서 목보호대를 3달이나 해야되고,
넘어지면서 모서리에 부닺혔는지 옆구리의 쑤신 듯한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돌 계단에 머리를 부딪친 탓에 턴넬 속에서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 듯한 극심한 어지러움으로 인해서
아프시다고 간혹 비명을 지르는 엄마는 보통 때와는 달리 꽤 다소곳하고 좀 부드럽기까지 하신다.
그리곤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신다. 나 역시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엄마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지낸다.
이 세상에 사는 인구의 반 정도는 여자이고, 이 중에서 적어도 70% 정도는 엄마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수많은 엄마들은 자기 식대로 자신만의 개성과 성격에 부합되는 엄마 노릇을 하고 있으라고 짐작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과 인내를 감수하고 조건없는 큰 사랑을 베푼다.
그래서 엄마에게 받은 하늘같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가슴은 따뜻해지고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저절로 피어난다.
(화사한 벗꽃 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엄마의 사랑은 어느 꽃 보다도 아름답다.)
하지만 나에게 나의 엄마는 두 가지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는 나의 존재의 모체가 되며, 60,70,80년대 한국 역사와 경제가 만들어낸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나와 동생들에게
희생과 사랑을 주신 노고 많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따뜻한 엄마이다. 주로 내가 어렸을 적의 엄마의 모습이다.
그 기억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은 정갈하게 양장을 입고 하얀 양산을 든 채로 미소띄고 나를 쳐다보시던 얼굴이다.
LA 에서 친정으로 향할 때는 주로 이런 엄마를 떠올리며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를 탄다.
또 다른 얼굴은 내가 성장을 하고 결혼을 한 후에 새롭게 각인된 엄마의 변화된 형상이다.
이 형상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띄고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불공정한 모습을 지닌 엄마의 모습이다.
기회만 주어지면 엄마는 힘겹고 지독히도 애쓴 인생을 살아오셨다고 푸념과 불평을 토로하신다.
한번 넉두리를 시작하시면 수십년 간의 메뉴를 순서대로 잘 꺼내오셨지만 이제는 앞뒤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식탁에 올리신다.
그러나, 딸이 보는 내 엄마는 복많은 분이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혼자 사시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없고, 자식들도 다 자리를 잡고 살고 있으며
그 손자와 손녀들 까지도 자신들의 길을 다양하게 잘 걸어가고 있다.
누구 하나 괴롭히는 사람없고 보태달라고 손내미는 사람없고 구차한 소리하는 사람도 없다.
아버지 살아 생전에는 남편에게 온갖 신경질과 성질을 다 부리셨었고,
지금은 가장 만만한 도우미 아줌마들에게 부담감 없이 큰소리 치시면서 지내고 계신다.
게다가 엄마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병원에도 모셔가고 필요한 사무 등을 봐주는 언니도 있다.
언니는 우리 집에서 9살 부터 나와 함께 살기 시작했었고, 시집 간 후에는 중간중간에 엄마의 눈 밖에 나서
우리를 떠나기도 했지만 정과 이해심 많은 아버지의 설득 때문에 다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나, 이런 엄마 위에서 자기 식대로 굳건하게 사는 큰며느리가 있다.
시어머니가 4일이나 병원에 입원해도 전화 조차 하지않는 큰며느리를 대하는 차별화된 모습은 전혀 엄마답지 않는 모습이다.
참다 못해 먼저 전화를 하신 엄마에게 큰올케는 아주 유쾌한 목소리로 "또 전화하세요!" 라면서 끊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인간 관계의 오묘함을 떠올린다.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친척들에겐 말없고 불평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셨지만,
실제로는 오해를 쉽게 하셔서 혼자 몹씨 화내는 두 가지의 모습을 갖고 있는 엄마이다.
자식들 눈치를 보면서도 자식들 각자에게 각기 다른 크기의 강함을 보이시지만,
큰 아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하다.
엄마에게 신경을 더 써주는 자식들에게서 불평거리를 더 찿으신다.
거의 모든 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정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신다.
아버지 제사 때에는 엄마 외에 아무도 참석지 못하게 하는 황당한 큰 올케에게 야단도 치시지 않는다.
아버지가 암으로 병상에 여러 달을 누워 계셨었을 때에도 손 한번 잡고 위로의 말을 전하거나
병간호 한번 하지 않은 며느리에게 별 불평도 않고 넘어가셨다.
아버지 49 제 때에도, 할아버지 제사 날에도, 그리고 내일에도 외국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에 역정을 내시지도 않는다.
무엇을 부탁하면 예~~ 라고 대답을 하고는 연락이 없는 사람이지만 큰며느리 대우를 해주신다.
나도 그런 성격의 며느리를 얻는다면 엄마 처럼 뒤에서 욕을 할망정 앞에서는 다 이해하는 듯이 받아주는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거실 의자에 길게 누우셔서 아프시다고 끙끙거리시는 엄마의 신음소리가 열린 방문 안으로 들려온다.
이번에는 꼭 좋은 도우미 아줌마가 들어와야 한다고 되풀이하시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리고 소개소에 전화를 거시는 소리도 들려온다.
내가 친정에 온 이후로 세번째 아줌마가 오늘 오셨다.
첫 아줌마는 4일 계셨지만 아주 오래 계신 쪽이었다. 내가 있는 바람에 나에게 자꾸 하소연하다가 엄마에게 들켜서 혼꾸멍이 낫었다.
설겆이 부터 반찬 만들기, 밥상 차리기, 청소하기, 화초에 물주기... 모든 것들을 엄마가 자신의 연륜 만큼이나 반복했던
순서와 방식으로만 해야한다.
그렇치않으면 일도 못하면서 남의 집 살려고 왔다고 호통을 치신다.
내가 옆에서 편을 들어서 못되게 행동한다고 결국 내보낸 첫번째 아줌마 뒤를 이어서 좀 젊은 아줌마가 두번 째로 왔었다.
하지만, 젊은 탓인지 엄마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만에 그냥 가버렸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에 낙상을 하셔서 입원하셨다가 어제 집에 왔고 오늘 세번 째의 도우미 아줌마가 왔다.
입주 가정부 할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지 계속 사람을 보낼 수 있는 소개소 소장은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아줌마에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인권" 이라는 단어를 가끔 생각했었다.
그리고 "인격"이란 단어도 생각한다.
나는 엄마가 인격을 갖고 부리는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면서 아줌마와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이번에 온 아줌마는 아주 착해보인다. 지난 10일간 엄마의 살림 방식을 보아 온 것이 있어서 설명을 잘해주면서
적어도 내가 돌아갈 때까지는 머물도록 도와주고 싶다. 이 아줌마도 하소연을 하면 적당하게 대처해야겠다.
엄마의 성격을 바꿀 수 없으니 아줌마가 최대한 적응을 잘하면 좋겠다.
또 아프신 엄마의 엄청난 신경질과 짜증도 잘 넘기고 싶다. 때론 빨리 돌아가고 싶어지는 답답한 가슴을 치겠지만 말이다.
(분당 탄천 산보 길에는 수많은 인생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색의 개나리가 한국 산천을 물들일 때는 얼어붙었던 관계의 해빙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누운 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오늘도 저녁 8시만 되면 나와 아줌마도 자야한다고 불과 TV 를 끄실 것이다.
나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새로온 아줌마는 좀 힘이 들 것이다. 하루 종일 명령에 시달렸는데 잠까지도 통제 받아야하니까.
내가 친구를 만나고 재미있게 지내면 친정에 와서 자기 욕심만 채운다고 투덜대신 적도 있기 때문에
이번 방문에는 엄마에게 올인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달리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 머물 때에 사고가 나서 딸 노릇을 충분하게 할 수 있으니 그나마 감사하다.
엄마가 있기에 나의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은 아직도 생동감을 갖는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집이 아직도 존재하므로 LA 에서 동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련한 그리움과 달려갈 수 있는 목적지를 구체화할 수 있다.
아직 엄마의 실체가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친정과 고국에 관한 이야기를 목메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엄마의 얼굴 속에는 그리운 아버지와 함께 고궁 나들이를 갔던 나의 예쁜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엄마의 꺼지는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지를 숙고하는 자각을 한다.
또, 엄마의 몸짓에서 나는 과연 어떤 엄마인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찿는다.
10일 후에는 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엄마의 심술마저 그리울 것이다. 멀리서 이해하기는 좀 더 쉬워질 것이다.
아마 그 때 충분하게 받아주지 못했다고 약간의 후회를 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꾸 넘어지시는 엄마에게 남겨진 지상에서의 시간이 길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곁에서 봐드릴 기회가 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순간은 행복한 보살핌의 기회이자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엄마와 딸의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친정에 와도 멀리 내집에 있어도 가끔 외로와지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기둥이 부실함을 느낀다.
그 누구도 채워주지 못하는 긴 공백과 어두움에 가려진 많은 순간들...
나는 지금 이 많은 순간들을
엄마의 짜증어린 소리로 바쁘고 화사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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