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 한국을 다녀왔다. 엄마와 시간을 가졌다. 총 64 시간이었다. 한국서 머물렀던 3 주 중에서 겨우 64 시간 뿐이었냐고
묻을 수 있겠지만 나에겐 쉽지않게 얻은 뜻깊은 시간이었다. 딸이 엄마를 찿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엄마를 만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KTX 를 타고 부산을 다녀오면서 가을 밤의 서울역을 한컷 찍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찿는 한국이지만 LA 삶의 연륜이 쌓인 탓인지 도착하면 하루 이틀 정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판과 가게가 너무너무 많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광경은 일년의 시간을 극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낯설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는 서울 생활의 편리함은 단연 돋보인다. 대중교통 수단의 우수함도 만족스럽다. 나의 여행 목적은 일 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짬짬이 짧은 여행도 다녀온다. 하지만 꼭 봐야하는 엄마와의 만남은 기대와 초조함으로
시작해서 매년 다르게 전개되곤 한다. 올해엔 엄마와 세번 만나서 두번의 일박이일을 지냈다.
84세인 엄마는 치매 노인이다. 연세에 비해서 젊어보이고 얼굴에 주름도 적다. 하지만 작년보다 몸이 크게 부해지셨다.
이제는 엄마의 식욕을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셨지만 작년과는 달리 만난지 한참된 큰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큰 동생은 엄마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다행이도 엄마는 나를 본 순간 '김 xx 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웃음으로 얼싸 안으셨다.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아버지가 11년 전에 돌아 가신 후로 엄마와 자식들의 관계가 한 동안 좋지않았다. 우리 형제는 속칭 유산과 감정 싸움으로
남보다도 못한 관계를 갖고있다. 돌이켜 여러모로 생각하면 애초에 엄마가 판단과 처신을 잘못하신 것이 사단인 듯하다.
큰동생과 올케는 그 것을 업고 작은 동생과 나를 몰아부쳤고, 작은 동생과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봐야 아버지 말씀대로
다 법대로 나누어지는 것인데 왜 그리 감정 소모와 투쟁을 했는 지 모르겠다. 아버지 처럼 엄마가 누나인 나를 살려주셨다면,
나를 좀 더 존중하셨더라면 동생들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며 엄마의 건강과 안녕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산다는 현실이 나의 추락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지금의 나는 엄마와 사는 작은 동생의 밥이다. 내 친구의 표현대로 함부로 대한다. 가장 엄마 성격을 닮은 동생은 형과의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 화나면 엄마를 무기로 으르렁거린다. 그래도 엄마와 함께 산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을'의 위치를 받아들인다.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다음 해가 되면 또 엄마 집을 찿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올 6월에 수원 법원 소속의 변호사가 엄마의 성년후견인으로 선임되었다. '변호사가 엄마의 재정을 전부 관장하고
엄마는 자식들이 상의해서 모신다.'가 판결이었다. 좀 편해졌다. 그 덕에 올해는 큰 어려움 없이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는 주 5일 동안은 분당의 한 '치매노인 주간 보호센타'를 다니신다. 대략 아침 9시 반에 나가셔서 5시 전에 돌아 오신다.
그래서 작은 동생은 나와 엄마와의 만남을 주말 시간으로 정했다. 한국에 3주를 머무는 동안 첫주말엔 엄마를 모시고
나와서 점심 식사와 동네를 길게 산책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 까지). 의자가 달린 보행기 (walker) 를 밀어야만 걸을
수 있는 엄마는 100 미터 정도 걸으시면 앉아서 쉬셔야 한다. 어떤 때는 10 미터 걷고 쉬자고 하신다. 그렇게라도 걸으실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두주와 삼주째의 주말엔 토요일 11시에서 일요일 4시까지의 시간이 있었다.
산보 중에 잠시 쉬는 엄마의 뒷모습이 작아져 보인다
분당서울대학병원을 다니시는 엄마는 너무 많은 약을 복용하고 계셨다. 아침 식사 후에는 14알, 점심 후에는 3알,
저녁 식사 후에 11알, 그리고 자기 전에 3알을 드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서 왜 이 많은 약들을 삼키셔야
하는지 말이다. 무슨 약인지 몰라서 골라낼 수도 없다. 내과와 정신과 처방약이라고만 알고있다. 다소곳하게 손에
약알들을 받아드는 엄마의 모습은 어린아이 같다. 막내 동생에게 물어보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결과가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모르면서 참견하지 말라고 할 것이니까.(어려서는 그렇치 않았다) 동생의 강한 성격은 엄마의 강한 성격을
누그러뜨린 듯하다. 새로운 강한 물체가 힘빠진 강한 물질을 깨뜨리는 모양새이다.
저녁약을 드리고 약봉투를 정돈하다가 사진을 찍었다.
엄마와 밤을 지내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이 없으신 엄마는 주무시면서 가장 말을 많이 하신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요' ''맞아요' '하라는대로 할께요'
'마음대로 하세요' '좋아서 그래요' '영감님이 기다린다고 해요' '공연히 눈물이 나요' ... 주무시는 엄마에게 다가가서 내 귀를
쫑긋 세웠다. 처음엔 잠꼬대하시는 줄 알았다가 계속되는 반복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힘없는 노인네 같으니...
6년 전 까지만 해도 엄마는 돈의 위력으로 자부심과 자만심이 대단하셨다. 누구에게나 호령하셨다. 한마디로 기세가
등등하셨다. 한편 통이 크고 순진하고 잘웃는 귀여운 면이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후로는 돈이
있어도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 믿었던 또는 믿지않았던 자식들은 모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아셨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치매의 긴 나락으로 떨어지셨다. 분노, 외로움, 낙심은 우울증을 만들었고, 우울증은 더 큰
노여움과 고독을 잉태했다. 자식들은 이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았다.
엄마는 말씀이 없다. 아니 안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치매라고 더 그런다. 틀린 말은 아니다. 30년 전, 10년 전, 일년 전,
한달 전, 일주일 전, 그리고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래도 딸이라고 나와 만나서 한두시간을 지내시면 말씀을 곧잘
하신다. 몸을 주물러 드리면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는 나를 잘 키워주셨잖아요' 라고 말하면 '낳았으면 열심히
키워야지' 하신다. 발톱을 깍아드리면 '고맙다' '딸이 몇명있어요?' 질문엔 '하나'라고 답하신다. LA 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화드렸다. '내년에 오면 또 같이 자요. 사랑해요. 엄마' 엄마는 대답하셨다. '나도 사랑해' 울먹이신다. 곧 잊으시겠지만.
딸이라고 하나면서 멀리사는 나는 정말 불효한다. 사정만 허락하면 얼마든지 잘해드리고 말도 자주 걸고 잡수시는 약도
몇가지로 확 줄여버릴 터인데...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정말 힘들었다. 작은 동생이 불편하지만 감사한다. 욕을 해도, 말도 안되는
말을 퍼부어도, 어거지를 써도 엄마와 사는 생활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춘 언니의 말 처럼 '게니까 엄마를
다루고 살지' 맞다!
난 이런 식의 엄마와의 관계를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행히 엄마는 돈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
누구나 살면서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다. 어떤 형태로 든지.
아버지 돌아가신 후의 지난 11년은 내게 고통이었다. 다행히 이제는 작은 안주를 찿은 것 같이 보인다. 물론 달라질 변수는
있지만.
dear mom:
건강하세요. 오래만 사세요.
잠 너무 주무시지 말고 정신줄을 놓지 않으시면 해요.
엄마에게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은 다른 누구에게든지 갚을께요.
내년에도 만나서 같이 지내고 여기저기 구경가요.
맛나는 것 먹고, 단풍 구경하고, 내 친구들과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말없이 서로 얼굴도 쳐다봐요.
이제는 동생들 다 보고싶지요. 엄마는 너무 보고싶을거에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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