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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부부의 탄생은 이란 사태와 역사적인 혁명들 만큼이나...

rejungna 2009. 6. 25. 07:47

지구라고 불리는 이 세상은 아주 넓고 크다. 한 구석에서는 기쁨이 넘치는 춤으로 인생의 환희를 노래하고,

세상의 다른 한 곳에서는 억압과 고통 아래 몸부림을 치면서 눈물을 흘린다. 지난 토요일 날에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장소에서  

나를 잠시 멈추게한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그 날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촌 시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결혼식에 이어진 피로연은 오후 6시 부터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탁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힐튼호텔의 창문 사이로 숨막히게 행진하는 

낭만적인 바다 풍경에 생각을 맡긴 채로 입안에서 살살 녹는 빵, 해산물과 커피를 음미하면서 새로 탄생된 멋진 커플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던지고 있던 들뜬 순간과 비슷한 시간에,

저 멀리 중동에 위치한 이란에서는 Neda Agha Soltan(네다 아그하 솔탄)이라고 불리는 26세의 젊고 아리따운 여성이 길을 가다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서 피를 흘리다가 숨을 거둔 사건이 발생했다.

 

 

San Francisco 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다른 곳의 바다보다 특히 더 강하게 뿜어대는 낭만과 도시 자체가 토해내는

자유로움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도시의 색깔은 맑고 투명한 빛을 띤 종합적인 색채이다. 시야 저 멀리 아스라하게 보이는

젊음과 열정의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오크랜드(Oakland)를 연결해주는 Bay Bridge(베이 브리지)를 배경으로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는

나라는 존재를 아주 보잘것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였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지난 주말 3일간은 세상의 현실과는 차단된 세상이었다. 차 안에서는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풍경과 책과 함께 있었고,

숙소에서는 친척들과 애들과 담소로 보내고, 식사 때가 되면 맛있는 음식과 색다른 분위기에 몰두했다. 그리곤 숨가쁘게

결혼식, 피로연, 폐백, 미사, 전 친척들이 다시 모인 brunch(브런치), 섬머스쿨을 하는 조카를 위한 버클리 방문...

또, 모든 통신 수단을 거절했기에... 다른 세계에 사는 네다의 죽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Family, friends mourn 'Neda,' Iranian woman who died on video

네다는 반정부 시위에 참석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희생양이었다. 

이슬람교 교리를 열심히 믿는 이란의 중산층 가정의 착실하고 꿈많던 여성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강한 호기심 덕분에 대학 졸업을 하고 여행 가이드가 되려고

교육을 받고 있었고, 음악과 여행에 커다란 열정을 가진 평범한 젊은이라고 한다.

친구와 길을 사섰다가 교통체증으로 차가 움직이지 않자 잠시 차를 세우고 길을 걷다가

시위대를 만나게 되었다. 순식간에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되었던 사복경찰 누군가가 쏜

총 한발을 맞고 쓰러져 피를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핸드폰으로 찍혀진 그녀의 죽어가던 모습은  facebook 과 twitter 같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동영상으로 전 세계로 중계된 덕분에 네다는 순식간에 이란 저항 운동을

상징하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모든 사건은 상징적인 인물이나 장소 덕분에 더 큰 의미를 갖게된다. 이란의 젊은 세대, 지식층과 개혁파들이 주동이 되어서

대통령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지금의 소요(uprising)가 국가의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아주 미약하다. 그러나, 이란의 소요 사태는- 성공했거나 실패했던 역사적인 모든 시위와 혁명들은

그 원인을 조명하고 과정을 추적해보고 결과의 영향을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한 것 처럼- 복잡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간과할 수 없는 뜻있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국민의 염원인 변화를 열정적으로 총, 칼, 침묵이라는 도구로 표현되었던 역사적인 혁명들은

그 나라 국민의 감정과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한국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은 혁명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중요한 사건이 된 혁명들도

총인구의 1% 위아래의 적은 숫자만으로 행해졌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1%를 조금 상회하는 인구만 가담했다.

아마 통신 시설이 거의 전무한 시대이기 때문에 동조를 하고 싶었던 국민들도 소식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이번 이란 사태에 100만명 정도의 사람이 참여를 했다고 가정한다면 1.5% 정도의 첨여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벌려놓은 틈새는시간이 흐를수록 메울 수 없는 균열이 되어서 사회 전반과 국가의 기존 체제를 잠식한다. 그렇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서 영리한 중국 정부는 인터넷 검색을 완전 차단해서 외부 세계의 영향력을 근절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이란 정부는

더 무섭고 독하게 시위대 진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단기적인 억압의 효과는 있지만 자유와 변화를 구하는 의지를 영원히 누를 수는 없다고 가르쳐 준다.

미국의 흑인들의 짓밝혔던 인권도 여러 움직임, 시위, 반항으로 다져지면서 마침내 흑인 대통령으로 날개를 달고

해방을 만끽하고 있지 않은가!

 

아래 사진들은 내가 배웠던 세 개의 혁명을 담고 있다.

  

 

위 사진은 왕정을 무터뜨리고 Soviet Union 을 세운,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의 St. Petersburg를 찍은 사진이다.

1917년 2월과 10월에 일어난 두 개의 커다란 혁명을 묶어서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는데, 2월 혁명의 중심지가 이 도시 였었다.

Nicolas 2세 황제에 대한 불신임, 정치적인 자각, 기회를 찿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국민들, 농작물 흉년, 농경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산업 시대의 대두, 경제적 불균등, 인플레이션, 1914년의 세계 일차대전의 참가와 실패... 너무도 많은 요인들이

잘 살고 싶어서 강한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혁명적 정신과 맞아 떨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2월의 일차 혁명 때는 왕정이 타파되고 Provisional Goverment가 형성되어 통치를 했으며, 10월의 2차 혁명 때에는 극좌파인 레닌이

이끌던 Bolshevik(볼세비크) 정당이 전역에 피로 물들인 숙청을 하면서 정권을 잡아 소련 연방국의 기초를 세웠다.

 

 

 

위 사진은 1956년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던 헝가리 정부와 러시아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헝가리 국민들의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서

헝가리의 수도 Budapest(부다페스트)에 진입한 러시아의 탱크들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다. 한 학생의 데모로 시작된 시위는 커지면서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방송하려고 했었다. 이 학생들에게 발포를 했던 소련친위대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혁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은 친러시아 정부가 붕괴되었다. 새정부는 공산국가 그룹인 Warsaw 조약을 탈퇴하고

국민들에게 자유선거를 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지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더 많은 군대를 보내어 부다페스트와 다른 도시를

침공했다. 결국 18일간의 혁명은 2,500명의 헝가리인과 700명의 소련군인 사상자와 200,000 명의 피난민을 양산했었다.

 

 

그 유명한 시 "프라그에 봄은 오는가?" 를 탄생시킨 Prague Spring(프라고 봄) 혁명은 개혁자였던 알렉산더 Dubcek(두브체크)가

1968년 1월 5일에 공산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으나 소련 군대와 Warsaw 조약을 맺은 주변 공산국가 군대가 진입한 8월 21일에 끝났다.

두브체크는 지방자치제와 민주화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주고싶어 했다. 메스컴을 개방하고 언론과 여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개혁을 시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 때부터 머물렀던 소련군대는 1990 년에야 체코에서 철수했다.

 

위의 사진은 체코 Velvet Revolution이 일어난 그 다은 날인1989년 11월 17일 한 여인이 전경 앞에 앉아서 촛불을 붙이는 모습이다.

무폭력을 지양하는 벨베트 혁명을 부드러운 혁명(Gentle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혁명은 결국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체코 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학생들의 시위에서 출발해서 전 국민들의 참여로 번진 시위 끝에

대통령은 사임하고 서독과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이 열렸으며 새대통령으로 바클라브 하벨(Vaclav Havel)이 선출되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 해인 1990년 6월에 체코는 자유로운 방식의 민주주의 선거를 44년만에 실시했다.

 

 

반미와 반서방 정책을 지양하는 이란의 대통령과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 역시 현재 시위대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던 혁명의 짜릿한 맛을 본 이란 국민들의 자유에의 뜻과 의지를

쉽게 꺾지는 못할 것이다. 국민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가 호메이니 통치 아래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로 변모되어

자기 정권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선거도 마다않는 것을 국민들은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도 많고 사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우리가 몸담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는 것은 다음 역사가 다음 세대에 말해주겠지만,

원하는 긍정적인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새대가 지금 바로 이 시간에 몸으로 뛰어야 가능해진다.

새 부부가 탄생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것 또한 우리 인생에서 혁명만큼이나 변화된 모습이며 생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