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빵집에 들렀다. 망설이다가 큼직한 팦도너츠 한개를 집어들었다. 오늘은 당분으로 날 위로할 마음이다.
사실 빵보다 진한 향기의 커피가 더 당긴다. 쇼핑몰에 새로 문연 앙증맞은 커피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decaffeinated
coffee 한잔 주세요' 없단다! 오늘이 첫날인데... 카페인 있는 커피에서 없는 커피로 바꾸겠다는 결심을 실행하는 첫날이다.
지난 수요일에 위내시경 검사를 실시한 의사가 커피는 decaffeinated coffee 로 마시라고 강하게 조언을 해서다.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즐기는 던킨도너츠의 decaffeinated coffee를 구입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생각으로 차를 미국 마켓 쪽으로
틀었다. 30 분쯤 후에는 커피 봉지 서너개 덕분에 향긋함이 삐져나오는 마켓 가방을 들고 집 현관에 들어섰다.
조용하다. 커피 봉지들을 부엌 식탁 위에 꺼내놓는 부스럭 소리에도 정적만 느껴진다. 편안하기만 한 집이 낯설고 벽이
너무 두텁다. 요즈음 내 가슴의 벽도 두터워서 탄력성은 저하되고 참기 싫은 멍한 무기력은 득세하고 있다.
틀을 깨고 싶은 날이다.
가슴 안에 작은 물체가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다.
혼자서 뒹굴다가 뛰고 한없이 걷다가 잠들고 싶다.
한국에 계신 엄마도 보고싶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 처럼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면 다시 힘이 생길 듯하다.
어린시절 발레리나, 스케이팅 선수, 춤추는 댄서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의 작은 호흡은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멈추었다. 신체는 고정되어도 정신은 흐물거리거나 매끄럽게 뻗는 몸짓들을 분주히 따라 다녔다. 무희들의 고혹적인
움직임을 한껏 살려주는 무대 음악과 조명 아래 함께 서있는 나를 상상했다. 춤 스텝은 고도로 짜여진 메뉴얼에
불과하지만 추는 이의 능력, 감각, 표현은 이 생명없는 교본을 살아있는 예술로 변화시킨다. 무희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창조자 같았고, 특히 발레리나는 언제나 나를 상상의 세계에서 헤엄치게 했다.
그런데... 발레리나 Alessandra Ferri (알레산드라 페리)의 최근 근황 뉴스가 튀어나왔다. 영국 화장품 회사 Boots가 새
제품을 선보일 광고 모델로 52세인 그녀를 선택했다. 파격적인 캐스팅과 신선한 광고 컨셉 때문에 인터넷이 시끌거렸다.
나는 광고를 여러번 되풀이해서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하며 수십년 동안 몸에 밴 발레의 기교는 흔들림이
없다. 프로는 여유와 편안함을 만든다. 진한 카타르시스가 내 몸과 마음을 훓으며 지나갔다.
19살과 52세 나이의 알레산드라가 동시에 출현한다.1983년과 2016년의 시간이 공존한다. 홀로그램 (hologram )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춤을 추다가 서로를 바라보기도 한다. 19살의 아가씨는 의아한 토끼 눈으로 지금의 자신을 쳐다본다.
중년의 발레리나는 여유있는 얼굴로 빨리 돌면서(spin) 과거의 자신에게 다가선다. 둘이 부딪치는 순간에 19세는 사라지고
현재 그녀만의 발레가 계속된다.
성숙한 여인이 앳된 소녀보다 더 좋아 보인다. 52세의 여자는 노련하며 우아하고 도전적이다.
그녀의 완숙미에 가슴은 뜨거워지고 기분이 고조된다. 숨은 고통, 피나는 연습과 노고를 생각하면 감동적이다.
이태리 태생의 알레산드라는 1983년19살 나이에 영국 로얄 발레단 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principal dancer 가 되었다.
2년 후에는 아메리칸 발레단의 principal 이 되어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22년 후 2007년 44살에 은퇴했다가. 거의 7년만인
2013년 50세에 현역으로 복귀했다. 남편이 그녀를 떠난 해다. 기쁨, 희열, 존재감을 주는 발레를 다시하고 싶었다 한다.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얻는 지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자가 된 그녀는 로맨틱한 사랑도 꿈꾼다.
컴백 후에도 그녀의 활약상이 눈부시다.
작년에는 초청 발레리나 (guest artist )로 로얄 발레단과 'Woolf Works' 를 공연해서 상을 받았다. 또 올해 6월 23일에는
뉴욕 발레단과 함께 뉴욕 Metropolitan Opera House 에서 '로미옷과 줄리엣' 의 쥴리엣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놀라운
제안에 몇달 고민을 하고 why not? 하며 수락했다고 말한다.
50살에 다시 돌아와서 무수한 우려를 부셔버린 발레리나!
52살에 화장품 모델이 되었고 53세에 10대의 쥴리엣이 된다. 자아를 다시 찿아가는 성숙한 변모들이다.
알레산드라는 작년의 인터뷰에서 컴백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once you realise it's never really over until it's over, every chapter of life can be exciting.'
(진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으면 인생의 모든 막이 전부 흥미롭다.)
광고의 catch phrase 처럼 'Ready for More' 의 마음 자세룰 갖는다면 두려움 불확실성 상실감에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다. 도전을 일상의 일부로 인식함으로 늪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가뿐히 일어나 '사는 것이 다 그런거지 뭐!'
중얼거리며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 길을 헤매는 자신의 모습에 갈등한다. 차츰 작아지는 목소리는 곤혹스럽다. 변화의 방해꾼이
자신임을 알기에 맥이 빠진다. 공허감을 어쩌지 못해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너무 앞서도 문제지만 자꾸 뒤로 물러서면
어느 순간에 갈증이 목을 조인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활기와 열정을 갖고 살 수는 없는 것!
요즘 많이들 100세 인생을 논하지만 실제로 몇세까지 몸을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사고의 낙오없이 살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죽음 직전까지 인생을 디자인해서 변화와 생각있게 꾸려나가면 좋겠다. 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자는 나란 것을 잊지
않으면 한다. 용기있는 선택을 하며, 삶의 행로의 길목에선 색들이 혼합해서 만든 쫄깃쫄깃한 맛을 기꺼이 수용한다.
따져보면 나름 멋있고 도도하면서 새침할 수 있는 날들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위로를 받지 못해도 곳곳에 산재한 위로를 찿아서 자율적인 치유를 하는 것은 나의 몫인 듯하다.
컴퓨터 덕분에 쉽고 빠르게 알게된 알레산드라 페리의 용기있는 인생 재도전은 잔잔한 흥분과 짜릿한 위안을 주었다.
덕분인지 나는 다시 구름을 쳐다보고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본다. 살아있음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
2013년에 출연한 'Woolf Works'에서 알레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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