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eartfelt story

나의 결혼 기념일

rejungna 2007. 7. 8. 02:27
 

 

미국서 2007 7 7(777) 특별한 길일이라고 하여 혼일 날짜로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 3만 8천 명 정도가 결혼 신청을 한 상태라고 한다.

7 7일은 나의 결혼 기념일이다. 나는 오래 해의7 7 12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때에 시아버님께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비록, 양력이지만) 날에 바늘과 짧은 시계 바늘이 만나는 시간으로 결혼 날짜를 잡자고 하셔서 나의 부모님을 탄복시켰었다.

이것은 아주 짧은 만남을 갖은, 그것도 미국에 살고 있는 남자와의 결혼이니 시부모님들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머리를 짜내신 결과 이기도 했다. 

 

정말 7 7일은 결혼을  하는 쌍에게 길일일까? 결혼 생활을 비추어 보면 그런 같다. 후광의 덕을 봤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남편과 선을 본지 달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시아버님은 친정 아버지의 아시는 분의 친구로 우연히 우리 집에 오셨다가 나를 보셨다. 때의 나는(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뭣도 모르면서 잘난 맛에 사는  대학원 2년생으로 독일 유학에 관심을 갖고 결혼에는 관심이 없던 여자였다. 줄아는 음식이라고는 김밥이 유일했었고 늦게 결혼을 해야 좋다고만 생각했었다. 아들이 미국에 있는지라 시아버님은 귀가 보이게 찍은 사진을 아들에게 보내고 싶으니 달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이것이 너무 이상하고 독특하다고 생각되었으며 결혼에 마음이 없었기에 정중히 거절을 하였다. 3개월쯤 지난 , 아들이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 나오자 친구와 전국 일주를 돌게 하시고선 우리 집에 2주간을 매일 오셨다. 아버지와 친구가 되시면서 딸을 달라고 말이다. 아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도 하지 않으시고 오셨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 아들과 주선해서 6 5일경에 처음 선을 보게 됐다.

인상이 착하고 좋은 사람인 같았지만, 전혀 내가 생각하던 남자 type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우리 가족은 어떻게 소화를 시킬지 몰라서 회의를 열었고, 이상의 진행은 3 2 부결 되었다. 이에 다시 시아버님이 우리 집을 재방문 하시기 시작하셨다. 주일간에 걸쳐서 아들이 얼마나 능력과 믿음성이 있으며, 좋은 사람이라는 것으로 결국은 친정 아버지를 설득하셨고, 우리는 다시 만나서 date 시작했다. 때부터 10 정도의 date 했고, 25 경에 결혼 보다는 약혼하기를 원한다는 우리 가족의 결정에 시아버님은 당분간 떨어져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약혼하면 깨지니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러시면서 바로 7 7 12시를 결혼 날짜로 제안하신 것이다.

 

남편은 결혼 1 주일 후에 미국으로 돌아 갔고, 나는 내가 결혼했다는 느낌도 없이 계속 친정서 살면서 대학원 학기를 마저 마치고 후에 미국으로 들어 왔다. 쯤에 시집 식구들도 모두 미국에 들어 오셨고, 나의 이민 생활은 고생 없이 LA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아들과 딸을 낳고 일도 하면서 평범하게 결혼 생활에 빠져 들어 가서 살았다. 애들이 대학을 가서 집을 떠날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돌아 보면, 우리는 분명 서로 반해서,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couple 아니었다. 떠밀렸었지만 기대감도 컸고 서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었었다.  살면서 정들고 연민의 정과 책임감을 갖고 있는 부부다. 그렇게 없이 지냈지만, 나는 가끔 해방되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며, 누구를 위한 삶을 있는가의 의문도 가졌었다. 남편도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항상 내가 느끼는 대로 상대도 느낀다는 것을 배운 것이 결혼 생활을 통한 첫째 lesson이니까.

 

나의 어딘가로 훨훨 날라 가고 싶은 욕구 처럼, 남편은 실제로 여러 오랫동안 날라 갔던 같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일과 집안 일에 매인 여자들 보다는 기회를 많이 갖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일들에 충실했다. 특별하게 드러낼 것도 없고 반짝이지도 않았지만 열심히 살았다. 애들도 반듯하게 컷고, 남편도 직장과 사업, 가정 일에 충실했으며, 나는 며느리로서 지금까지도 년에 10 이상의 집안 행사에 식구들을 불러 밥을 함께 먹는다. 그리고 시집 식구들과 형제 같이 지낸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부모님과 얼마 동안 함께 살았었고, 일을 해서 돈도 많이 벌어 봤다. 똑똑한 자식을 두었다고 부러움도 받아 봤다. 학교에 다니면서 지식 욕구도 채웠다. 우리는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친구와 남편 친구들로 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couple 이다.

 

아마도 특별하게 행운이 많이 깃들은 7 7일에 결혼을 했기 때문에 지금껏 우리 부부만 아는 여러 고비를 넘기고 살아 같다. 부부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잡아 것은 나에게 하늘같은 친정 아버지의 얼굴과 시집 후로 나를 시집 식구로 길들이기 위해서 무던히도 많은 요구를 하셨던 시아버님이었다. 분의 성격이 정반대였던 것처럼 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를  붙들어 주었다. 분은 멀리 떨어져 계셔서 속사정을 모르시지만 무한한 격려로, 다른 분은 눈치로 주변을 정돈해 주셨다. 식구들을 불편하게 만드시면서 까지 관여하시기도 했다.

 

분이 가시고 지금, 나는 억지로  남편을 사랑할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편한대로, 주어진대로, 믿는대로 받아 들일 것이며, 자리가 남편 바로 옆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뜨겁지는 않아도 친구같이 마음 편하게 같이 움직이면서 늙어가면 되는 아닌가! 나는 안다. 가끔 정열을 쏟을 대상을 그리워 것이다. 나를 채워줄 있는 무엇인가를 갈망할 것이다. 남은 여생동안 속을 터놓고 정신적인 치유를 있는 친구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달래려는 마음의 이지 않을까?.

내가 자신을 달래는 만큼 남편도 자기 자신을 달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에는 뜨겁지는 않았지만 정성을 쏟았던 결혼 생활을 했다고 말할 있으면 한다.

그럼 힘은 바로 7 7 12시가 conjure 것이며, 어른들이 내게주신  legacy 이고 내가 애들에게 물려 주고 싶은 legacy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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