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heartfelt story

남동생들과 가족이라는 것- 케네디 가족(Kennedy clan)이 주는 시사점

rejungna 2009. 8. 27. 08:07

 

어제 밤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미국 정치 왕가의 왕자이면서, 가난하고 없는 자들 편에서 평생을 뛰어온

위대한 입법자(법을 만든 사람)이자 명연설가, 화합의 달인인 그는

첫째형을 세계 이차 대전 중에 잃고 둘째와 셋째 형은 비운의 총에 잃었지만

꾿꾿하게 자기 자리와 소신을 지켜온 경애로운 인물이다. 존경스런 분이다.

 

그의 부음을 들으면서 한 세대가, 한 사람의 인생이, 미국의 기둥이

스러져갔다는 생각을 했다. 케네디 식구들은 집안 전통에 따라서 항상

사회적 문제에 눈을 돌리고 산다. 이 집안은 가족과 형제들이 무엇이며,

서로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전에 쌓은 물질적 정신적인 유산이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때가 되면 아무 것도 지니지 못한 채로 영혼을 날려보내야 하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와 형제와 한 가족을 이루고 또 남과 만나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며 산다. 

내 가족, 형제, 동생을 생각해 본다. 내 남동생들과 나에게 주어진 가족을 생각한다.

 

딸과 함께 이곳에 사는 작은동생 가족을 방문한지 열흘 쯤 되었다. 올케와는 가끔 전화를 하지만 정작 동생의 얼굴을 본지는 꽤 되었다.

동생은 나에게 부탁이 있거나 업무가 있을 때만 짧게 전화한다. 하지만 그 부탁이나 업무의 횟수 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조카가  한 학기를 프랑스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에 출국을 하기 때문에 잘다녀 오라는 인사를 겸해서 용돈을 주고 싶었다.

기특하게도, 돈을 벌기 시작한 딸도 외사촌 동생 셋에게 용돈을 주고 싶다면서 현금을 준비했다. 반갑고 기분좋은 점심 식사 자리였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듯이 동생은 마땅치않은 얼굴을 하고 퉁명한 언사로 아무나 걸고 넘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누나의 말도 잘라먹거나 요리조리 따지면서 토를 단다. 분위기에 눌려서 세 조카는 조갑지 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내 옆에 앉은 딸은 연실 내 무릎을 쿡쿡 찌르면서 모른 척하라고 계속 신호를 보냈다.

 

파도가 해안가를 치는 것이 새삼스레 보이 듯이 잊고 있던 답답함과 슬픔이

가슴 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어 왔다.

5년 전에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작은 동생의 얼글에서는 웃음이

거의 사라졌다. 외국 생활은 외롭고, 하늘 같이 의지하던 존재는 더 이상

세상에 없고, 형에게 받은 상처는 깊고, 또 주위와 자신의 걸었던 길을

되새김질하는 중년의 나이 탓이겠지!

 

하지만, 곁에 있기 불편해진 동생의 여린 속을 안다. 무표정하고 독이 들어간 듯한

저 얼굴을 이해한다. 왜 마음을 못잡는 지를 헤아릴 수 있다.

"그래도 좀 웃지. 내일 떠나는 아들에게 칭찬좀 하지. 저렇게 의젓하고 기특한데!

 편안하게 다녀 오도록 해야지. 아빠인데!"

나는 생각을 입밖으로 쏟아내지 못하고 혼자 담아두었을 뿐이었다.

 

보통 성장해서 결혼을 한 사람들은 두개의 가족을 갖는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가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사랑과 보살핌을

주로 받던 결혼 전의 가족과 결혼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갖고 탄생시켰지만

부단이 사랑과 보살핌을 주어야하는 나중에 만든 가족!

이렇게 두 종류의 가족을 말한다. 

 

우리는 첫번째 가족과 한 식구라는 생각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의문도 없이 하지만, 두번째 가족은 노력과 시간을 먹고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삐꺼덕거리면서 우리의 일부가 되다가

종내는 우리가 이것의 주인이 되어버린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 두 가족을 조화롭게 이끌 수 있다면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그리고 시집과 처가 식구들 까지 포함하는 큰 군단, 즉 든든한 응원군을 얻는 셈이 된다. 실로 복받은 삶이다.

 

현재 나의 첫번째 가족의 형태는 내가 오랫동안 익숙하고 정들었던 것과는 무척 다른 모습을 하고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마치 드라마 속의 단골 모양새 같다. 함께 20년을 훨씬 넘도록 모든 것을 나누면서 웃고 울던 형제가 만든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이 김빠진 모습에 여자인 나 보다 남자인 작은 동생은 상처를 털지 못하고 그것을 여전히 투박하고 두꺼운

피딱지로 방치해두고 있다. 그의 무겁고도 살을 쿡쿡찌르는 마음의 짐을 이 세상의 누가 받아서 내려놓을 수 있을까!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을 터인데...

 

 

나에게는 남동생이 둘있다. 남다르게 우애가 갚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어도 아버지 밑에서 편안한 사이였었다.

만나면 반가와 하고 웃는 사이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않계신 후로 관계는 변했다. 상대방 입장을 헤아리기 보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먼저 앞세운다. 이제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옳았고 그릇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작은 단순했다. 미국에 사는 나와 둘째 동생이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에 서울의 큰동생 부부가

형제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병실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유산은 아버지의 것이 었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우리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누나는 동생을 챙기지만 남동생은 누나를 챙기지 않는다. 아주 당당한 큰동생과 흥분했던 작은동생 사이에서 나는 누구의 편이

되어야하는 지를 결정해야 했고, 결국 어정쩡하게 어느 한쪽에게도 확실한 편이 되어주지 못하고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 듯이

욕을 먹었다. 아버지가 가신 후 유산포기 기간인 90일이 지난 후로 서울의 큰동생은 우리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와 동생이

서울 가서 연락을 해도 되지 않는다. 집을 방문을 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내 자식이 가도, 막내 동생의 애들이 고국을 방문해도

조카들을 보지않는다. 자신에게는 형제가 없다고 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에는 오직 엄마만 참석할 수 있다.

작은 아버지도 작은 엄마도 사춘 동생들도 가족의 제사에 참석할 수 없다. 번거롭고 복잡한 것이 싫어서 란다.

 

나의 자부심이었던 첫번째 가족의 모양새는 순식간에 이렇게 변모되었다. 큰올케가 깊숙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아내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큰동생은 그 것을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엄마마저도 숙수무책이라서 속상해 하시지만 노인이어서 그런지 그런데로 별 상관없이 잘 지내신다. 엄마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만

그래봐야 소용도 없다. 그냥 이대로 몸과 마음 편하게 지내시는 것만도 나를 도와주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큰아들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사람이고, 작은 아들은 방문과 전화로 진심으로 엄마를 생각해주니 고맙고, 딸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s.o.s.를 청할 수 있는 믿음성이 있으니 좋고... 건강 외에는 큰 문제가 없으신 것 같다.

 

그러나, 먼 곳에서 상관없는 듯이 살지만 계기가 있을 때마다 첫번째 가족의 모양새에 고통을 느끼는 나다.

가슴 한 구석이 애이고 중요한 무엇을 성취하지 못한 실패자 같은 느낌,

눈 앞에 놓인 바위덩이를 돌아가려고 해도 달리 길이 없는 답답함,

웬지모를 수치심과 분노, 친정과 고국을 잃어버린 듯한 허탈함과 상실감,

돌아가신 분에 대한 죄송함 때문에 더욱 밀려오는 그리움.

 

 

막내 동생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기운이 빠진다. 속에 엉겨붙어 있는 상처에 햇빛을 쪼이고 그 속의 고름을 짜주고 싶다. 

기다리면 해결된다고 강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마른 나무가 비틀어져서 힘들게 열리는 문짝 처럼 사방으로 빡빡한 동생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해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할을 하고 싶지만 혼자만의 생각이어서 무력함을 느낀다. 

아내에게 속이야기하면 도움이 되련만 좀처럼 말을 않해서 작은 올케는 상황도 잘 모른다. 두 동생이 왜 이렇게 다른지...

남자라서 그런 것인가? 중년의 남자에게는 속을 터놓고 치유를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누구를 붙들고 울면 않되는 것일까?

  

인생을 걷다보면 나의 참뜻이 이해되지 않고 나의 진정한 속이 오해를 받고 내 생각이 간단하게 무시되는 때가 종종 있다.  

두개의 가족을 가졌다면 나중 것 때문에 먼저 것이 깨지지 않도록, 먼저 것 때문에 나중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한다. 

누구나 시간을 지날 수록 두번째의 가족을 더 소중해하지만, 지나간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특수한 추억들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부모의 심정을 알아 들으면서 첫째 가족들의 마음도 여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떠나도 정작 남는 것은 내 몸과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좋은 기억과 조상이 물려준 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읽은 도종환 시인의 <마지막 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의 일부다.

... 용서한다는 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인내를 필요로하는 사랑입니다/ 때론 바다보다 넓고 산보다 크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도/

바늘 구멍 들어갈 틈도 없는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합니다/ 부족하고 부조리하고 유한합니다...   

 

동생들아. 우리 이제 함께 웃자.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던 여유로운 그 웃음들을 비슷하게 흉내만이라도 내자.

이렇게 사는 것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농락하는 것이며, 그 간절함을 외면하는 것이며, 그 따뜻한 가슴을 얼음조각으로 채우는 짓이야.

우리 모두 잘못했잖아! 모두 다. 응?

  

1938년에 찍은 케네디 가족 사진이다. 가운데 무릎에 앉은 막내인 테드 케네디가 6살 때이며,

오른쪽 윗 얼굴은 이차대전에 파일럿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제일 큰형의 얼굴이다.

모두 아들 넷에 딸 다섯, 누나 한명(Jean Ann kennedy Smith)만 아직 생존해 있다.

 

 

가족의 대부 격인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고(1963),

더 이상 가문 중에 미국을 대표할 big shot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테드 케네디는 오바마를 가장 먼저 밀어준 인물이었다(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