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추운 겨울에 한국을 찿았고, 또 아주 오랜만에 소담하게 내리는 맛깔스러운 함박눈을 보았다. 이미 거리, 빌딩과 나무에는
백색의 눈이 차가운 날씨 후광을 업고 우아하게 좌정하고 있었지만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LA에서도 먼 산 위를 덮고있는 가늘고 긴 눈을
가끔 보았었다. 하지만 펄펄 내리는 눈을 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아버지 성묘 후 돌아오는 길은 회색빛 하늘에서 날리는 작은 눈발로 어지럽기 시작하였다. 오늘 눈이 온다고 하였었는데...
그런더니...
정말 커다란 눈송이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날리기 시작하였다.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꽃송이..."
공간에 찍힌 수많은 점 같이 보이는 어지러운 눈발들이 아파트 거실 유리창을 지나서 아래로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얼른 밖으로 나갔다.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에. 순간을 현실로 포장해서 남기고 싶어서.
하늘서 내려오는 눈을 올려다 보는 마음은 이미 땅에 내려서 쌓여있는 눈을 내려다 보는 마음과 사뭇 다르다.
쌓여있는 눈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연상하는 다리가 되어줄 망정 나와 함께한다는 존재의 친근감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내리는 눈은 나를 비껴서 돌아앉은 부처처럼 매정하게 저만치에 내려앉아도, 내 몸을 부드럽게 만지는 인사를 하고 땅으로 떨어져도,
내 체온 안에서 인어공주 처럼 작은 물방울로 흔적없이 변해버려도... 나와 함께 숨쉬면서 감정을 나눈다는 현재진행형의 생동감있는
감성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 마치 내 속에 꼭꼭숨은 게으른 영혼을 깨우려는 듯하기도 하고, 기지개켜는 영혼이 채 활기를 띄기 전에
하얀 옷 속에 묻어버려서 존재마저 감추어버리려는 것 같기도하다.
나의 영혼이 차가운 공기 속에 깨어난다면? 아무도 모르게 내 영혼이 하얀 창살 속에 갇혀버린다면?
올 겨울의 LA는 지겹도록 비에 시달려야 했고 한국처럼 미국 동부와 중남부는 눈 속에 묻혀야했다. 미국에서는 어제 눈때문에
자그마치 2,279개의 항공기 출발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이 주는 낭만보다는 불편함에 힘들어해야 했다. 우리가
이기심으로 가득차서 지구가 싫어하는 것들을 멋대로 만들고 소비하고 버리기 때문에 날씨마저도 지금껏 해온대로 순리대로 지내기엔
너무 지친 듯하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눈이 오면 꽃과 과일이 편하게 쉬면서 성장할 수 있는 온실 지붕이 가라앉을 정도로,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나고 사는 집이 침수되어 다른 곳에다 잠자리를 찿아야하는 서글픔에 목이 메일 정도로 오나보다.
그래도, 그래도... 하얀 백색을 탐하는 것을 배려심없는 혼자만의 놀이라고 비난받는다면 안타깝다.
저 하늘 높이서 어지럽게 떨어지는 이방인같은 작은 눈송이도,
내 시야가 어렵지않게 머물 수 있는 곳까지 내려온 친근해진 눈송이도,
바로 내 머리 위에서 손에 잡힐 듯이 반가운 친구같은 눈송이도,
내 외투에 내려앉아 이미 나와 한식구가 되버린 눈송이도,
그리고 내 발 밑에 아주 조용하게 내려앉은 거만한 눈송이도,
모두모두 제 갈 길을 알고있는 듯이 치우침없이 고르게고르게 주위를 덮어준다.
하늘의 눈이 땅의 눈으로 변모하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좋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진부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기에.
날리는 눈 속에 서있는 나도 그들처럼 가볍게 날을 것 같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어긋나게 움직이는 멋진 춤을 출 수 있을 듯하다.
규칙이나 어떤 제약에도 억매이지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섬뜩한 자유가 보인다. 입센(Henrik Ibsen)의 인형의 집(A Dall's House)의
주인공 노라(Nora) 처럼 자신과 자유를 찿기 위해서 길 떠난 한 여자가 서 있다. 양 손에 가방을 들고 앞만보고 정처없이 걷는 노라가
있다. 얇게 쌓인 눈에 남겨진 발자욱을 돌아본다. 잠시 완전한 자유와 환희와 생동감에 들떴다. 커다란 눈송이에 혹했다.
2011년을 11번째 맞은 날 한국의 분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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