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곳들(여행)

한국여행-안면도, 해미읍성, 전주 한옥마을, 남산타워

rejungna 2011. 9. 8. 00:16

 LA 아닌 서울에서 큰 집안 행사가 있었다. 그 덕에 우리 식구도 한국에 들어오고 시집 식구들도 여러 명 한국에 들어왔었다.

모두 13명. 시누님은 자그마치 20년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 동안 한국을 다녀갈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식구는 모두를 위해서 아주 사적인 일주일간의 한국여행을 준비하였다.


행사를 치른 다음 날에는 서울 구경을 했다. 대형 관광버스 덕분에 첫날은 호사스러웠다. 강남, 삼청동, 삼청각에서의 점심식사,

인사동, 명동, 한강변을 누비고 다녔다. 인사동의 관광은 뜨거운 햇살에 진이 빠져서 쇼핑하는 아이들을 전통찻집에서 기다리는

것으로 대체되었고. 일본인과 중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명동에서는 사람들에 치여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싯점에 커피빈에서 냉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하지만 중앙 우체국 건너 편에 위치한 일품향 중국집에서 저녁으로 먹은 

짜장면과 짬뽕은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선사했고, 불빛에 반짝이는 한강변을 달리다가 건너보는 여러개의 한강다리의 아름다움은

낮의 더위를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그리곤 삼박사일의 여행을 안면도로 떠났다. 안면도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과 고남면을 이어주는 섬이다. 원래는 육지, 즉 반도이었던

땅을 1638년 선조 때의 영의정이었던 김유가 한양으로 신속하게 세미(세금으로 받은 곡식)를 수송하고, 또 왜구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잘라내서 섬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6번째로 큰 섬이라고 하는데, 1970년에 완공된 태안군과 이어주는 

다리 덕분에 다시 육지의 일부가 된 느낌을 준다.



위는 머물렀던 안면도의 당암바다 펜션의 모습이다. 방 두개와 거실과 부엌은 적당한 크기로 숙박 시설이 편리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거실의 오른쪽 창과 방의 왼쪽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다는 내가 섬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래 사진의 밀물과 썰물의 바다는 퍽이나 인상적이고 아름다웠다. 부담없이 자신을 온전히 들어낸 썰물 때에는 갯벌을 걸으면서

조개와 굴껍데기를 주으면 다시 소녀가 된 듯한 착각을 하게된다.



지역적인 음식은 신선하고 맛깔스러워서 생선회, 대하, 굴밥, 삼선 짬뽕, 바지락 칼국수를 먹는 기쁨이 컸다. 특히 그릇에 담겨져

나온 살아있는 대하(큰 새우)는 기운이 얼마나 좋은지 한참이 지나도 뚜껑을 열기만 하면 동시에 일제히 튀어나와서 방바닥이나

식탁 위로 떨어졌다. 곧 이어서 터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와 웃음소리는 소금 위에 구워서 먹는 싱싱한 새우맛 이상가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하루는 서산시 해미읍에 있는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지를 둘러보았다. 보통 산이나 강을 끼고 건축되는 성과는 달리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어진 해미읍성은 깨끗하게 보존된 읍성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찌는 여름이었지만 초가집 지붕 위에 매달린 

박과 쑤세미는 가을을 향한 큰웃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790년 부터 100년간 천주교 박해 시기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철사로

나무 가지에 매달아서 고문하거나 죽이는데 쓰였다는 읍성 안의 호야나무는 인상적이었다. 수천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온갖 방법으로 고문, 살해, 생매장, 참수했다는 해미읍성 서문 밖의 참혹한 역사는 읍성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세워진 해미성당과

그 주변의 기념관, 순교탑, 추모시비, 참배실, 기록관, 모형, 묘지 등등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순교지를 둘러보면

우리 선조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한 잔인한 방식에 크게 놀라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잔인한 동물인가보다!

가슴이 먹먹했다.



몽산포 해수욕장을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 찿아갔다. 백사장의 길이가 3.5km 나 된다는 해변은 기대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마침 썰물이어서 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조개와 작은 게들이 유유하고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갯벌의 경사가 완만해서 석양을

보면서 걷기에 좋았다. 바다와 육지를 가르는 계단 위의 땅에는 해송이 바람 따라 몸을 틀면서 멋지게 자라고 있다.

한번쯤은 낭만에 젖어보고픈 충동을 느끼게 하는 해변이다.


하루를 잡아서 전주 한옥마을을 방문했다. 미리 요청해놓은 가이드는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가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이 

한국말을 잘하지만 어려운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가이드 서비스가 필요했고 가이드는 그 임무를 아주 훌륭하게 해내었다.


한옥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많은 일본인들이 전주성 서문 밖에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전쟁 양곡의 수송을 위해서 성벽을 없애고 도로를 건설하면서 남문을 제외하고는 전주성을 허물어버렸다. 이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성안으로 진출했고, 이들의 서문 중심이었던 상권은 커져서 전주 최대의 상권으로 부상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은 1930년 부터 

교동과 풍남동에 한옥촌을 형성해서 모여살기 시작했다. 또한, 전주 이씨인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는 조선 초기에는

한양 다음가는 도시로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는 궁전), 태조가 왜구를

토벌하고 축하 연회를 열었다는 정자인 오목대, 이조시대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가 거주하는 승광재도 이곳에 있다.


 


오목대에서 내려다본 한옥마을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옹기종기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서있는 기와 지붕은 단아한 인상을

주었고 우리의 정기과 기백을 담고 있다. 단순하고 순한 듯하지만 불의에 도전하는 기개를 지닌 강인함도 느껴졌다.



한옥 동네의 아름다움은 역시 골목길에 있다. 어딘지 일본 냄새가 풍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나즈막한 담을 따라 걷는

내 발걸음은 한옥마을의 유래를 기억하는 사연깊은 골목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이드는 설명했다. 전주 한옥마을의 

특수성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한옥의 모습에 있다. 즉, 살아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아직도 주민이 살고있으며 

시대에 맞게 개보수를 하기 때문에 여느 문화재 처럼 어떤 시대의 한 모습을 변함없이 완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대상, 한옥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고 했다.



태조 이성계를 기리는 경기전의 입구와 대한황실 승광재의 간판이 보인다.



한옥마을 안에는 민박이 잘 되어있다. 위는 어는 민박집의 모습이다. 아늑한 마루과 객실로 들어가는 방문이 대감집 처럼 보이게

한다. 마당 한쪽에는 갖가지 장을 담은 크고작은 장독들이 촘촘하게 서있다. 장독은 여유로움과 풍요함을 상징한다. 

한가롭게 햇빛을 쬐면서 장을 익히는 여유로움과 많은 사람을 먹일 음식을 만드는 기본 재료로 채워진 풍요함이 어울려진 장독은

한옥집의 미를 돋우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잘익은 장만큼이나 전주의 음식은 맛있다. "궁"이란 식당에서 먹은 한정식은

어느 집에서 먹은 음식보다도 부드러웠고 식재료가 훌륭하게 어울려져서 요리된 기억에 남는 식사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남대문 시장 쇼핑도 하였고 남산 타워 N그릴에서 멋진 저녁 식사를 했다. 너무 크지 않은 남대문 시장은

시내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장을 둘러보기에 아주 적절한 곳이다. 한국의 패션은 미국과 달라서 구입해서 가져가더라도

잘 입게되지 않기 때문에 옷 구입은 되도록 자제했다. 하지만 속옷과 노점에서 구입한 운동복 바지는 아주 만족스럽다.

45분만에 360도를 회전한다는 N그릴은 야경 좋고 음식 좋았다. 서울 동서남북의 황홀한 야경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분위기를

잡으면서 즐길 수 있어서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약간은 어지럽게 느껴졌다. 가운데 뾰족한 탑 본체는 

정지된 건물이고 튀어나온 부분만 회전하지만 바람이 불면 본체도 좌우로 흔들린 탓인 것 같다. 그래도, N그릴은 멋진 식당이어서 

추천하고 싶다. 식사 후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밑으로 내려온 것도 좋았다. 


이렇게 식구들은 일주일 간의 한국여행을 마치고 LA로 돌아갔다. 기억은 남지만 꿈에서 깬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말 그대로 콩볶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무척 아름다운 한국여행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