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섬 소유권 분쟁으로 한국, 일본, 중국의 대립이 심상치 않다. 하지만 극동의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건,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것에 분통터진다. 한결같은 뻔뻔함이 도를 넘는 듯하다. 그들은 한점의 주저함도 없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 했다. 독도는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일본땅이다. 그래서 한국의 비상식적인 망동에 실망했다.'
점입가경으로 '일본 국가와 군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라고 까지 거짓말한다. 잠자코 있기에는 내 자존심마저 상한다.
내가 아는 독도 분쟁의 역사를 되새겨본다면: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증거의 확인을 위해서 1905년 전후의 한국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해에 무력과 협박으로 조선과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채결해서 합병의 기초를 다졌다. 힘없는
조선을 삼킨 합병의 초석은- 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인 민비 세력을 척결하려고 일어난 1884년의-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조선의 봉건주의를 끝내고 근대화를 꾀하려던 일본파 개혁파들의 반란으로
겨우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일본의 야욕의 문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로 일본의 내정간섭이 더 심화되었고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었다. 11년 후인 1895년에는 '여우사냥' 암호명으로 민비를 칼로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태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873년에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고종황제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려서 조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세명의 비밀 특사를 보냈다.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지배하려
함을 세계에 고했다. 일본은 고종황제의 특사파견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황제를 협박을 했고 결국 고종을 폐위시켰다.
그리곤 고종황제와 민비의 유일한 적자인 순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혔다. 하지만 내관을 매수해서 그가 마시는 홍차에 독을 타서
순종이 계속 병치례를 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순종 3년 1910년 8월 29일에 공식적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했고, 이 날은 한국의 국치일로 남게 되었다. 폐위되어 야인으로
12년을 살았던 고종황제마저 1919년에 독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민중이 거세게 항거한 것이 바로 삼일운동이다.
전후에 한국은 1945년 9월 28일에 발효된 맥아더 라인으로 인해서 한국 해역에서 일본 어선 조업이 금지되어 혜택을 보았었다.
하지만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미일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맥아더 라인은 자동 소멸되었다. 이에 일본이 우리 바다에서
날뛸 것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서둘러서 6.25 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에 이승만 라인을 발표했다. 이승만 라인은
한국과 일본이 평화를 유지하고, 독도를 포함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을 공표하는 대통령의 선언으로 평화선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평화선에 이의를 제기했고 독도의 영주권을 재차 주장했다. 그리곤 1954년 9월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다. 못먹는 감을 찔어나 보려는 듯이.
이렇게 일본은 우리가 힘이 없을 때에 국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독살했으며, 나라를 뺏았앗고, 딸들을 수 많은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잡아갔다. 인권유린, 징용, 학살, 고문, 생체실험, 주권 강탈을 자행했다. 일본이 전쟁서 패한지 67년이
흘렀지만 전범의 대장인 천황은 아직도 잘못을 시인않고 있다. 웃기게도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다고 우기는 상황이다.
이웃나라의 땅과 주권을 찬탈했다면 전쟁에서 항복한 순간 빼았었던 것들을 전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나는 독도가
확실한 대한민국의 영토로 온 세계에서 인정을 받을 때에 비로소 일본으로 부터 한국의 독립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독도는
102년 전에 잃었던 주권 회복의 마지막 퍼즐 조각인 셈이다. 한국은 일본이 미쳐서 공연히 우리 것을 자기네 것으로 때를 쓰는
것이므로 세계가 다 알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보다는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모든 서류와 근거를 찿아서 거짓의 정당화를 위해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가는 일본에 맞서도록 해야 한다.
[아래는 미주 중앙일보의 논설고문인 박용필씨의 글이다.}
[윌셔 플레이스]히로히토의 인간선언
By 박용필 논설고문 기사입력: 2012. 8.20
일본 왕실과 관련한 금기어 중 하나가 '닌겐센엔'이다. '인간선언'이란 말이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새해 교지를 통해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공개 선언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일왕 스스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인간선언'을 한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 점령군 사령부는 일왕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한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해 히로히토를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펼쳤다. 치욕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미군의 강압에 결국
굴복한 것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나와 우리 국민 간의 유대는 상호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이지 신화와 전설에 의한 것은 아니다.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
초법적 권위로 절대복종의 명령만을 내리던 일왕이 직접 육성으로 '나도 사람이다'라고 밝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은 '신'의 영어 번역이다. 일본에선 현인신(現人神)과 현어신(現御神)의 두 종류로 분류한다. 전자는
'살아있는 신'이고 후자는 '신으로 태어난 사람'을 뜻한다. 원문엔 후자로 표기돼 있다. 예수가 인간의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나타났듯
일왕도 그렇다는 의미가 강하다.
번역을 맡은 인물은 레지널드 블라이스. 일본인 보다 더 일본화 됐다는 영국인이다. 그가 동양에 첫 발을 내디딘 곳은 뜻밖에도
조선이다. 일제강점 시절 경성제국대(현 서울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10년 넘게 살았다. 여기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배운 그는
나중에 도쿄에 둥지를 틀었으나 전쟁이 터져 포로수용소에 감금됐다. 적성국 시민이라는 이유에서다.
블라이스는 일본 패망 후 왕실의 '입'으로 신분의 급반전을 이룬다. 히로히토의 신임을 얻어 '닌겐센엔'의 영어번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현어신'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채 어물쩍 신(divine)이라고 옮겨놨다. 일부에선 의도적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현어신'이 뭔지 모를리가 없는 그가 연합국 측을 속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파 인사들은 이를 근거로 히로히토의 '인간선언'은
'현어신'을 포기했을 뿐 일왕은 여전히 '현인신'이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에 일본 지도층과
정치권이 광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에이런 라제어는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히로히토도 '인간선언'에서 일본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라고 실토한 바 있는 마당에
사과를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근대역사에서 링컨의 노예제도 사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대인 학살 침묵 사과 리하르트 폰 바이트제커
독일 대통령의 2차 세계대전 만행 사죄는 사과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힌다.
사과는 관계회복의 열쇠이자 갈등과 위기를 풀어나가는 상생의 소통법 가운데 하나다. 더 이상 약자나 패자의 변명이 아니라
'리더의 언어'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일본이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독일처럼 진솔하게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사과하세요. 늦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이제 일왕이 주변국들의 요구에 반응을 보여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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