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LA에서 12 시간 비행기를 타고 로마의 Fiumichico 공항에 도착했다. 그 다음 날이 부활절이어서, 우리는
복잡함을 피하려고 먼저 아씨시를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웠기에 곧바로 테르미니 중앙역으로 향했다. 예약해둔 기차
시간까지 충분해서 전철을 탈 계획이었는데 호객하는 택시 운전사에게 잡혀서 셔틀 택시를 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편하고 돈은 절약되고 헤맬 필요도 없이 중앙역에 도착했다. 첫번째 계획 완수!
로마의 테르미니 중앙역
시간이 많아서 아주 천천히 이층 식당가에서 5가지 메뉴를 선택한 뷔페와 커피 타임을 가졌다. 음식맛은 별로,
사람들은 목소리 크고 불친절, 커피맛은 아주 좋고, 화장실 갈 때는 1유로씩 지불해야 했다. 화장실에서 버벅거리다가
청소하는 아줌마의 호통을 들으면서 '이태리에서는 화장실 경영이 기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씨시 까지는 고속열차가 없어서 완행열차를 타고, 또 중간인 Foligno 에서 갈아타야 한다. 개찰구가 '3 east' 였는데,
east 는 저 멀리 걸어가야 하는 줄도 모르고 개찰구 3 주위를 맴돌다가 뒤늦게 알고는 뛰었다. 다행히 출발 3분 전에
올라탔다. 휴~~~ 열차 시간이 충분해서 역에서 공연히 빙빙돌던 여유로움이 무색했지만 운이 좋았다.
놀랍게도 기차는 정시에 출발!!! 다시 한번 휴~~~
3 시간 이상 걸려서 아씨시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완행열차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통근 기차라는 인상을 주었고 간혹
한국서 온 아줌마들의 작은 일행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마치 초행길이 아닌 듯이 민첩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대단한
'Korean women's power'라고 생각했다.
아씨시역의 Town Center행 버스 정거장
Town Center 에 들어가려면 역에서 버스를 타야한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또 택시 기사의 끈질긴 구애에 무너졌다.
값도 깎아주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려준 값이 정가였다. 이태리를 찿는 여행객이라면 듣는 소리인 '조심하라'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로마서 다양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언어는 영어면 충분했다.
숙소인 수도원에서 언덕을 올려다보면서 찍은 사진이다.
아씨시는 세계에서 중세도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태리 중부의 Umbria 지역에
위치한다. 타운은 산등성이에 형성되어서 멀리서 마을 전체가 계단처럼 다 보이고 마치 요새같다. 실제로
동네를 걸으면 곳곳에 성문이 보이고 비탈길과 계단을 무수히 오르고 내려야 한다. 아씨시에는 예술품과 의미있는
건물이 많으며, 도시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다. 동네 인상은 예쁨과 평화로움이었다. 언덕 정상에 있는
'Rocca Maggiore'성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최고라고 하는데 거기까지 올라가지 못했다.
또 아씨시는 프란시스코 성인의 고향으로 성지다. 여기서 프란시스코 교단이 창시되었으며, 가톨릭 신자는 물론이고
프란시스코 교단에 입단한 교인들은 꼭 찿고 싶어하는 곳이다. 우리는 프랑스인이 세운 수도원에서 이틀 밤을 묶기로
예약을 했었다. 수도원은 현재는 수도자들이 많지 않아서 남는 방을 여행객들에게 빌려주곤 한다는데 아침도 주었다.
아주 간단, 간결한 방에서 첫밤을 지내고 종소리를 들으면서 싱그러운 아침을 맞았다. 조촐한 식당은 프랑스인들로
붐비었다. 그들은 빵과 커피로 아주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그 날이 부활절이라서 우선 'The Basilica of
St. Francis' 로 향했다. 성 프란시스코 대성당에서 부활 미사를 첨례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렸으니 신기하고 대단하다!
대성당을 찿아 걸어가면서 그리고 돌아 오면서, 또 숙소인 수도원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거리의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아씨시 거리에는 예쁘고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서 볼거리가 많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우리가 묶었던 수도원 숙소로 들어가는 성문이다. 이 밖이 town center인데 안에서 동네가 서로 연결된다..
대성당을 찿아 걷는 길 저 멀리에 성당의 위용이 보인다. 건물들은 벽돌을 구워서 지은 둣했고 지나온 시간이 짧지
않음이 보인다. 건축에 쓰인 돌은 아씨시에만 있는 돌이라고 한다. 관광객들과 순례객들이 한 무리를 지어서
비탈길을 올라갔다. 모두들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도 이들 중의 하나라는 마음에 가슴이 벅찼다.
또 하나의 성문을 지나 대성당 입구에 다다르면 먼저 넓직한 광장이 나온다. 이태리에서는 성당 앞에 광장이
있다. 아마도 광장은 마을의 중심이며 신자들의 한 마음을 꽤하는 곳인 듯했다. 광장은 수도원을 연상케하며
아름답고 한쪽으로는 Umbria 넓은 평원이 내려다보여서 멋지고 꽉찬 인상을 주었다.
대성당은 아래와 윗층, 그리고 지하의 crypt 로 이루어져 있다. crypt는 보통 대성당의 지하실을 말하는데,
이 곳에는 성인이나 유명인의 무덤 혹은 석관이 있다. 광장에서 들어가는 성당은 아랫 성당이고, 계단이나 비탈을
올라가면 윗성당이 나온다. 보통 대성당이라고 말하면 위의 성당을 의미한다.
아래 성당은 1228~1230년에, 윗성당은 1230~1253년에 봉헌되었다.
아랫 성당의 정문이다. 위에 장미창이 있다.
이층의 대성당으로 올라왔다.
성당은 프란시스코 성인이 돌아가신 바로 후인 1228년 부터 짓기 시작해서 윗성당이 1253년에 완공되었다.
양식은 고딕형식으로 천장이 높고 정문 위에는 장미창이 있다. 윗성당에는 Giotto(조또, 혹은 지오또) 가 그린
28개의 fresco가 벽에 그려져있다. 프란시스코 성인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너무도 유명한 미술품이다.
철학자인 보나벤추라의 '위대한 성인' 책의 내용대로 그림을 그렸다. Giotto는 후세 이태리 미술에 큰 영향을 준
중세의 미술가다.
*이태리 문화를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하는 말이 fresco 와 chapel 이다.
fresco란?
젖은 plaster에 물감으로 빨리 그린 그림인데 보통 그림보다 보존이 오래간다. 르네상스 시대 대부분의 그림이
프레스코인데 주로 벽과 천정에 그려졌다.
chapel이란?
성당 경내에 있는 작은 예배당이다. 성당들은 가운데 홀에 pew(긴의자)들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양옆으로
chapel 이 오른쪽 하나, 왼편 하나, 이렇게 짝을 이룬다. 요즈음은 체플에서만 미사드리는 경우가 많다.
crypt
위는 아래 성당 지하의 crypt (지하실)이다. 앞 중앙에 성인의 유해를 담은 석관이 있다.
유해는 현재 치아라 대성당 자리에 서있던 St. George 성당에서 훼손을 방지할 목적으로 1230년에 옮겨져서
1818년 까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추어졌었다. 1818년에 아랫 성당의 제대 아래를 파헤쳐서 crypt 를
완성하고 유해를 석관에 담아 모시고 있다.
잠깐 짧게 St. Fransis 성인에 대해서 알아본다면:
1181~1226년 생애, 이태리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아버지는 비단 장수로 부유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운동과 친구 좋아하고 호탕했지만 불쌍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다 주곤했다.
프란시스칸 1회인 Order of Eriars Minor (작은 형제회),
2회인 Order of Saint Clare (여성들의 클라라회),
3회인 (여행을 하면서 전교를 할 수 없는 남자와 여자를 위해서) Third order of St Francis를 창설하였다.
이 외에도 동물과 자연 환경의 수호신이다.
1224년에 몸에 오상을 받았고. 1228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아랫 성당에서 부활 미사를 기다리면서 한 장 찍었다.
우리는 영어 미사 참석을 위해서 윗성당을 가려했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랫 성당에 자리를 잡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서 이탈리어 미사를 했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윗성당의 제대 정면이다. 뒤의 많은 의자들은 사제들을 위한 것이다.
위 아래 사진이 윗성당 모습이다.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몰래 제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제대 뒤에서
정문을 바라보면서 한 컷씩 찍었다. 아름다웠다! 지오또가 그린 프레스코는 13세기 그림치고는 사실적이었고,
천장의 그림이 멋지고 인상적이었다. 사실, 난 그림을 볼 줄 모른다. 무척 아쉬웠다.
윗성당은 밝고 화려한 분위기를 주었고, 아랫 성당은 어둡고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윗성당 제대 뒤에서 성당 정문을 바라보면서 찍은 사진이다.
정문 위의 장미창이 햇살에 아름답다. 장미창은 고딕건물에만 있다고 한다.
언덕 위의 성 Rocca Maggiore는 적의 침입을 막고 주민들에게 위용을 보여주려고 아씨시를 잠시 점령했던
독일 추기경이 1174년에 건설했다. 1198년에 동네 사람들이 부수었고, 1367년에 Albornoz 추기경이
재건축하였다.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계곡과 평원의 전망이 너무 멋지다고 한다.
Piazza del Comune, 아씨시 성 안의 가장 중심 광장이다.
이 곳에는 관공서와 괘테가 방문하고 칭송했던 St. Marie Sopra Minerva Church 가 있다.
**아씨시를 대표하는 볼거리, 즉 성당이 대부분이다.
성당이 많다. 하지만 아래에 나열한 성당들만 언급하고 포스팅하겠다.
*San Rufino, 루피노 성당,
*Basilica of St. Clare, 클라라 대성당,
*Damiano Church, 다미아노 성당, 그리고
*프란시스코 성인이 고치고, 살고, 돌아가셨던 성당 안의 작은 성당인 'Portiuncula 포르티운쿨라' 성당과
큰 성당인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o,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루피노 성당
윗 사진은 *루피노 성당의 앞면이고 아래 사진은 경내다. '아씨시 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만큼 오래 되고
의미있는 성당이다. 루피노 성인은 238년에 아씨시를 기독교화 했으며 순교했다. 이 성당에서 프란시스코와
치아라(클라라) 성인이 어릴 때에 영세받았다. 1140년에 건축되었으며, 정면은 로마네스크 스타일이다. 3개의
아름다운 장미창이 인상적인데, 장미창은 밖에서 보다 실내에서 볼 때에 스며드는 햇살로 무척 아름답다.
루피노 성당 내부
치아라 성당 정면. 앞에 광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앉아서 쉬거나 담소를 한다.
*'Basilica di Santa Chiara' 성당이다. 클라라 성녀 (1194-1253)를 기리는 성당답게 여성적이고 아름답다. 성녀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그녀의 사진, 옷가지, 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성녀의 유해도 프란시스코 성인의 것 처럼
600년 감추어져있다가 긴 발굴 작업을 통해서 1859년에 찿았다. 유해는 곧 치아라 성당으로 옮겨져서 현재의
모습으로 안치되고 있다. 성녀가 돌아가신 후인 1260년 정식으로 'Order of St Clare'(빈자의 자매회)가 창단되었다.
이 교단은 가난, 검소, 노동, 기도와 은둔생활을 지향한다.
성당은 1260년에 건축되었다.
치아라 성당은 아씨시 타운에서 프란시스코 대성당과 반대 방향으로 떨어져있지만 서로 마주 보고있다.
프란시스칸이었던 성녀는 프란시스코 성인과 아주 특별한 관계였다. 나이 차이가 20살이 넘는 영적인 부녀 사이로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성인은 성녀를 프란시스칸으로 받아주고 힘을 주었다. 성녀는 성인의 병간호를 했으며,
성인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마지막 거처인 '포르티운쿨라' 성당으로 가실 때에 들것에 누워서 성녀가 머물던
'다미아노 성당'을 지나가시며 창문을 통해 성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클라라 (치아라) 대성당 내부
아래 사진은 원래는 '다미아노 성당'에 있던 십자가이다. 프란시스코 성인이 아래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 중에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성당 보수에 몰두했다고 한다.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는 이 곳서 살던 클라라
성녀가 선종한 후에 치아라 대성당을 건축하고 성녀의 유품을 옮길 때에 함께 옮겨졌다고 한다. 십자가는 치아라
성당 내의 아주 작은 경당 (chapel)에 모셔져 있다. 경당은 원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치아라 성당 내의 채플. 십자가는 다미안 성당에서 옮겨왔다.
*Damiano, 다미아노 성당이다. 작은 성당으로 아씨시 성벽 밖에 위치한다. 성당이자 수도원이었다.
프란시스코 성인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이 성당에서 기도 중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망가진 내 집을
고치라"라는 말씀을 듣고 성인은 이 교회를 고치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고 가진 것 다 팔아서 성당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러므로 이 성당에서 프란시스코 교단의 '가난의 정신'이 시작된 셈이다.
성인은 다미아노 성당 뿐만 아니라 아씨시 주변의 무너져가던 성당을 여러 개 보수했다.
클라라 성녀는 1210년 16살 때에 거리에서 프란시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집을 나와 베내딕도 수두원에서
지냈다. 후에 프란시스코 성인이 성녀가 자기 뜻대로 종교 생활과 전교를 할 수 있도록 다미아노 성당에서 살도록
도와주었다. 성녀는 여기서 가난을 실천하고 빈자들을 도우면서 프란시스칸으로 살았다. 따르는 여자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여동생인 아그네스도 들어왔다. 성당에는 성녀의 기도방, 추종자들의 기도방, 성녀의 집무실,
잠자리이자 돌아가신 흙바닥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녀의 선종 이틀 전에 교황님이 '빈자의 자매회'를
인가했다.
아래 사진은 다미안 성당 내부를 구경하는 경로 중에 올라간 이층 기도방에서 내려다 보이는 부속 건물의 모습이다.
가운데 우물이 있고 복도 뒤에는 방들이 있는 듯하다. 성녀를 따르는 여자들이 기거한 수도원이다.
기와 지붕과 집을 지은 돌들이 인상적이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아씨시에서 마지막으로 구경한 곳이 아씨시 역전 근처의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상당히 크고 세상의 프란시스칸 단원들이 성지순례차 꼭 찿는 성당이다. 이 성당 안에는
프란시스코 성인이 고치고 기도하고 돌아가셨던 아주 작은 성당 *'Portiuncula, 포르티운쿨라'가 있다. 여기서
프란시스칸 교단이 창단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를 가진 채플이다.
성당 안의 성당인 '포르티운쿨라' 성당이다. 아주 작다.
성당 안의 성당 포르티안쿨라는 전설에 의하면 4세기 경에 지은 교회다. 하지만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 '내 집을
보수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로 프란시스코 성인은 허물어져가는 성당 여러 곳을 보수 수리했다.
그지 같이 떠돌던 성인이 여기서 정착을 하시자 추종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의 가르침 대로 청빈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이에 1211년 프란시스코 교단이 창단되었으며, 이곳저곳을 돌면서 가르침을 전파하던 성인이 자신의
죽음을 아시고 1226년에 돌아와서 그 해 10월에 선종하셨다. 지금은 예쁘게 단장되었지만 흙집이었다.
장미 정원 옆에 세워진 성인의 동상이다. 손에 든 새집에는 실제 하얀 비둘기가 살고있다.
성인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굴렀다는 장미가 보존된 정원이다. 장미는 동상 아래 피어있으며 꽃은 없었다.
성인의 선종 후로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미를 옮겨 심으면 가시가 다시 자라난다고 한다.
아씨시에는 이 외에도 구경할 곳들이 많지만 이 정도로 끝낸다. 어쨋든 구경 한번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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