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저녁을 먹은 후인 사방이 컴컴해졌을 때에 우리 집 뒷마당 북서쪽 후미진 곳에서 죽기살기의 한판의 승부가 벌어졌다.
고양이의 비명소리와 앙칼진 울부짓음, 그리고 멀린(우리 집 개의 이름)의 목에서 삐져나오는 정글에서나 들리는 것 같은 괴상한 괘음과
낑낑거림이 조용한 집 주위의 차가운 공기를 날카롭게 가로 질렀다.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마당으로 들어오는 다른 동물들에게 절대로 관대하지 못한 마당지기 멀린이 자존심을 걸고
고양이 한 마리와 필사적으로 난투극을 벌리는 소리였다. 자나깨나 그토록 철통같이 사수하는 자기 영역이건만
어디서 왔는지 사태를 파악치 못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옆집 담을 타고 우리 집 뒷마당으로 슬그머니 들어 왔던 것이다.
멀린은 만 9살 먹은 진도개 숫놈이다.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조금 늙은 개인데, 하는 짓은 철없는 어린이와 같다.
태어나자마자 우리 집으로 온 녀석인데, 일년 먼저 식구가 되었던 누나 빈(Bean)이 너무 여리고 순해서
반대급으로 좀 사납게 짖어대던 녀석을 골라서 데리고 왔더니 충성스럽고 용맹하기 그지 없건만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건들을 종종 일으켜서 긴장시킨다.
미국에서는 키우는 개가 다른 애완용 동물이나 사람을 물면 소송을 당할 위험이 높기 때문에 한마디로 요주의 개이다.
이곳 사람들은 지극 정성으로 개들을 산보시킨다. 특히 주말은 개세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감탄스럽게도, 하루에 두번씩이나 바깥 구경을 하는 개들도 많으며,
주인이 바뻐서 할 수 없으면 개산보시키는 사람(dog walker)을 고용해서 운동을 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나 편안한대로 개를 키우던 나도 영향을 받아서 할 수 있으면 주인의 도리를 하기 위해서 가끔 데리고 나간다.
특히 함께 지내던 누나 빈이 죽은 후로는 혼자지내는 멀린이 불쌍해서 좀 더 신경을 써주고 있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않은 탓인지 멀린은 다른 개나 집앞에 앉아있는 길고양이들을 보면 공격적인 자기 본성을 나타내서 애를 먹힌다.
특히 미국의 고양이들은 개를 무서워하지 않아서 개가 코앞까지 가까이 와도 절대로 피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기에,
멀린에게는 더 건드리고 싶고 또 공격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 같다.
한번은 산보 중에 영화 촬영을 하는 무리들을 만났었다. 그냥 지나치지않고 이것저것을 구경하면서 주인공을 찿으려고 가늠하는 차에
그 곳서 일하던 사람 한명이 다가와서 멀린이 참으로 예쁘다면서 머리를 만졌다.
그 남자의 움직이는 손과 거의 동시에 그의 손을 살짝 물어버린 멀린 때문에 욕먹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을 온 적도 있다.
법정에서 보자고 할까봐서 말이다. 정말로 간이 콩알 만해졌었다.
또 한번은 동네 상가에서 베글을 먹으면서 개줄을 잡은 채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아는 친구에게 다가온 듯이 부드럽게 멀린에게 접근한 다른 개의 목덜미를 순식간에 물어버린 것이었다.
개 주인 할아버지의 슬픈 눈과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너무도 놀라고 당황을 해서 멀린의 줄을 확 잡아당기면서
애타게 사과를 했다. 다행이도 물린 개가 가만히 있었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물린 개를 쓰다듬으면서
놀랬지만 괜찮다고 개 주인 할아버지에게 말해주는 바람에 그 자리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다른 개와 융합을 잘하지 못하며, 용감하다면 용감하고 공격적이라면 공격적인 독불장군인 진도개의 특수한 기질 때문에
키우면서 늘 조심을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통제하는 능력이 없기에 다른 동물들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어쩌지도 못한다.
땅과 나무를 타고다니는 재빠른 다람쥐, 가끔 땅에 앉은 참새들, 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
포섬(possum: 쥐과에 속하는 동물인데 아주 크고 더럽고 못생기고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을 죽어라고 쫓아다니거나,
때로는 이빨로 물어서 죽여서는 몸의 일부가 튀어 나온 것을 전시품같이 잔디나 시멘트의 눈에 잘띄는 마당 복판에 적나라하게 놓곤한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했던 고양이는 몸집이 좀 큰 놈인가 보다.
괴상한 소름끼지는 소리에 마당으로 뛰어 나가보니
차고 뒤쪽에서 힘겨운 소리를 내면서 혈투를 벌이는 두 마리 동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앞으로는 진도개를 키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불안하고 안절부절한 마음에 꽤 긴 듯한 시간인 5분 정도 흘렀고...
드디어 조용해졌다.
멀린에 대한 걱정과 나의 무력감이 한꺼번에 순간적으로 몸에서 빠져 나가면서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에 열린 유리 문으로 보이는 멀린의 머리는
어두움 속에서 피가 불빛에 반짝이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내가 키우고 밥을 주는 개이지만 무섭고 정이 떨어져서
열어놓은 문을 닫고 얼른 집안으로 들어와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환한 빛이 세상을 다시 밝게 비추기 시작하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멀린을 불렀다.
얼굴에 뿌려졌던 피가 마르니 덜 흉하기는 했지만
몸과 얼굴 여기저기의 쥐어뜯긴 상처가 대단했다. 쯧쯧... 죽기살기로 싸우더니...
우선 피를 씻겨야하건만 함부로 어디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킬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니 내 손으로 씻길 수 밖에...
해가 하늘 중천에 뜨고 기온이 올랐을 때에 식구들과 함께 뜨거운 물을 받아서 칫솔을 이용하여 살살 목욕을 시키고 약을 발라주면서도
멀린은 낯선 남의 집 개만 같았다.
우리 식구들에게는 언제나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주인 말을 듣고 있다는 눈빛으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만,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는 한치의 관용도 없는 멀린이 집동물이 아닌 야생동물 같이만 느껴졌다.
멀린은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꼬리를 완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1시간 이상 씻기고 털을 말리고나니 좀 나아보인다. 상처에 흐르는 피를 딲아주고 약을 발러주면서 않된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슬며시 다시금 우리 집에서 내가 밥을 주는 개같이 보인다.
내가 엄마라고 자칭하면서 9년 이상을 키워온 우리 집 마당지기 멀린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멀린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 보다 주인을 침입자들로 부터 보호하겠다는 높은 뜻을 품고 고양이와 혈투를 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 고양이가 손톱으로 할키었던 자국은 멀린의 얼굴에 긴 상처의 줄을 남겼다.
고양이의 손발톱에 찍힌 자국은 커다란 검은 점같이 얼굴에 새겨졌다.
고양이에게 물어뜯긴 그의 한쪽 귀는 피딱지가 져서 벌겋고 얼룩진 흉한 모습이 되었다.
몸의 서너군데는 털이 뽑혀져서 분홍색의 살갗이 드러나있다.
그래도... 그 동안에 나누었던 정이 무서운지, 함께 산 세월이 무서운지,
어제 부터는 언제나 반기면서 나를 멀끔히 쳐다보는 멀린이 다시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용쓰면서 뺏던 기운을 차리고 축쳐진 어깨도 올리라고 냉동고에서 불고기를 꺼내어 구어주기도 하였다.
그래, 멀린! 너는 여전히 내 자식 같은 한식구야. 나의 움직임과 마음을 알려고 애쓰는 고마운 존재이구.
나를 의지하고, 내 눈길을 따라서 움직이고, 상처 투성이의 얼굴을 내 다리에 비비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어.
어쩌냐! 너나 나나 태어나서 고향을 떠나 외국에 살면서도 타고난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외롭고 귀한 생명체인데...
정이 떨어져서 멀~리 보내고 싶던 멀린이 다시 측은하게 보이고
기운을 차렸는지 사납게 짖기도하고 날쎄게 움직이는 모습에 다행함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p.s. 일주일이 지난 지금, 멀린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몸 상태가 거의 다 회복된 반면에,
싸웠던 고양이는 우리 뒷집의 차고 뒤에서 몸이 만신창이 되어서 죽어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생각했던 대로 몸이 15-20 파운드(6.8 -9 kg) 정도 나가는 꽤 큰 고양이였습니다.
뒷집 아이들이 놀다가 발견한 길고양이의 죽음의 원인을 우리 개가 제공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정도이면 미국에서는 개를 없앨 이유가 충분히 됩니다. 위험을 미리 방지하는 것을 아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멀린의 단속과 함께 간단한 개훈련을 시도하고 있으며,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많은 접속과 함께 좋은 관심과 댓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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