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언제 불러도 묵직하고 가슴에 와닿는 호칭입니다.
가진지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의 얼굴은 선명하고 목소리는 귓가에 생생하며 미소는 따스이 정이 넘칩니다.
올 해는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어서 한국 전쟁 이야기가 다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6.25 전쟁은 아버지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역사임을 압니다.
아버지,
지난 일요일은 미국의 아버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시아버님 두 분을 떠올렸지요.
두 분 모두 제게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는 아버지의 사랑은 당연한 것으로,
시아버님의 사랑은 삐딱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분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을 고백하며, 아버지께 길고 긴 편지를 띄웁니다.
아버지,
수원의 부잣집 큰아들로 태어나셨지만 할아버지가 작은 할머니를 여럿 두시는 바람에 상처가 컸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구부정한 허리로 평생 일만 하셨던 할머니가 불쌍하셔서 할아버지와 사시던 첫째
작은 할머니에게 반항을 많이 하셨지요. 분필로 그 집 앞 대문 위에 돼지 그림을 그리기도 하셨습니다.
성인이 되면 성공해서 고생만 하신 우리 할머니의 한복을 금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결심하셨다지요.
호강시켜드리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어요. 하지만 불가능한 그 꿈 때문에 마음아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17살 때에 돌아가셨거든요.
18살 고등학교 3학년 때에 6.25가 터졌지요. 아버지는 처음 3달 정도를 누님인 고모댁에 숨어계셨는데,
모두 헐벗던 시절이라 고모부의 불편해 하시는 기색에 중간에 낀 누나의 고충을 생각하고 집을 떠나셨습니다.
밖에 나가서 공산군에게 잡히기 보다는 국군 자진 입대를 결심하셨습니다. 나이를 1살 올리시고, 입학 시험을
통과하신 후에 몇 주의 훈련을 받고 1950년 말 혹은 1951년 초에 전시 사관학교이던 육군종합학교 18기
소위로 임관하셨습니다. 최전방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고 공산당의 잔혹함에 평생 치를 떠셨습니다.
임관식을 같이 한 동기 수 백명의 소위들 중에서 전쟁 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휴전 후에도
군인의 길을 가신 아버지는 6.25 전쟁 중에 부대를 시찰했던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이 두고간 군사교본
영어책 한 권을 달달 외운 덕에, 그리고 군인들의 취침 시간인 밤에 화장실에서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열공하신
덕에 아버지는 장교 미국 유학 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셔서 1954년에 대망의 유학 길에 오르셨습니다. 자신의
일등을 확신하셨던 아버지는 1등을 한 장교가 경기고등학교 졸업생이란 것을 알고 받아들이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는 한 달 정도의 군함 승선으로 태평양을 건너서 조지아주의의 Fort Banning 미국 육군보병학교에서
9달 연수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미국 유학 시간은 천상의 시간처럼 즐거웠습니다. 미국의 대단함과
관대함에 아주 큰 감명을 받으셨지요. 저는 키 크고 인물 좋으신 아버지가 군복이나 사복을 입고 미국의
관광 명소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긴 사진첩을 아버지의 책장에서 꺼내 미국으로 가져왔습니다.
돌아가시기 두 세 달 전의 외출 시에 스러져가는 몸을 쉬려고 이용하셨던 낚시 의자와 같이요. 낚시 의자는
제 책상 밑에서 발을 올려놓는 도구로 매일 만나고 있어요. 사진첩은 이사 후에 창고의 책장으로 옮겨
정돈해 놓았습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언제봐도 너무 젊고 멋지고 자랑스럽습니다!
귀국 후 아버지는 얼마 후에 가정을 이루셨고
광주 보병학교 근처의 조선대학에서 법학과를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길에서 쓰러지신 후에 학교를 그만두셨고,
부대에서는 원자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근무하셨습니다.
하지만 상관의 불의를 보고 못참으시는 성격 때문에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전쟁 후에 부대에 배급된 쌀과 휘발유를 팔아먹는 장군들에게
저항해서 징계를 받으셨고, 또 고급 장교의 재교육을 시행하는
새로운 법 때문에 필기시험을 치러야 했던 장군들의 감시자로
교단에 섰을 때는 자유롭게 컨닝하는 그들의 행위를 참지
못하시고 겨우 대위 계급장을 다신 분이 언론사에 고발하셨지요.
결국 이 문제는 큰 이슈가 되었고 힘들게 압박을 받으신 아버지는
제대를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준전시 때라 제대가 불가능한
시기였지요.
아버지는 고민 끝에 전쟁의 상처로 약간 정신나간 사람
흉내를 내셨습니다. 덕분에 큰 제대금과 소령 계급을 달고
제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명령 불복종의 죄목으로
후에 국군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아버지는 동작동에 있던 할아버지의
산소를 후에 수원으로 이장하시면서 아주 멋진 가족묘를
만드셨고, 아버지의 수원 친척 어른들도 묻히게 하셔서 우리는
식목일마다 일가 친척들과 함께 벌초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았습니다.
아버지 재대 후의 첫 사업은 작은 아버지와 함께 하신
쌀 장사이었습니다. 제대금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탄 서울행 기차칸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덕분이지요. 시골과 서울의 쌀 가격의
차이가 커서 시골에서 쌀을 사서 서울에서 팔면 큰 이득을
본다는 정보를 귀담아 들으신 것입니다. 기대만큼 수입이 좋았는데 왜 장사를 그만두셨는지의 이야기는
잊었습니다. 동생을 결혼시키고 쌀가게를 처분하신 후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종로에 터를 잡으셨습니다.
종로예식장 바로 앞 코너 건물에 위치한 작은 담배가게를 구입하셨는데, 그 가게는 제과점에 붙어
있었습니다. 담배가게의 장사 재미는 쏠쏠했습니다. 나와 내 큰 남동생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그 가게 안에서 '가갸거겨... 하늘천 따지... '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과점 가게 건물 주인이 갑자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갑자기 없어진 사람들이
정보부에서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는 분에게 부탁해서 주인아저씨를 도와주셨고, 아저씨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제과점을 넘기셨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부족해서 주인 아저씨의 친척과
동업을 했는데, 그 아주머니가 자주 돈을 훔쳐서 양말에 넣는 것을 엄마가 아신 후에 아버지는 주인 아저씨와
담판을 하셨습니다. 그 후로 독자적인 경영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몇 년 동안 아저씨에게 돈을 갚아나갔지요.
이렇게 해서 저는 빵집 딸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 집은 조금씩 승승장구를 했지요. 가게가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이 되기도 하고 집에 자가용도 생겼습니다. 그 때 그 시절에는 빵집이 하나의 유행이었거든요.
서양 문물을 직접 체험하는 길인 듯이 사람들은 빵을 먹고 케익을 샀습니다. 그러다 종로 3가 단성사 옆
큰 터로 제과점을 이전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큰 어려움 없이 컸지만 부모님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빵공장 직원들과 가게 직원들, 집 안의 식모아줌마 등으로 항상 고용인 문제를 고심해야 했고, 재료 구입
때문에 거의 매일 아침 시장을 가셨습니다. 부모님은 돈버는 만큼 애를 쓰셨습니다. 밤 12시에나 가게 문을
닫아서 항상 잠이 부족했어요. 그 때를 기억하면 두 분이 가게 의자에 앉아 졸던 모습도 있고, 손재주가
좋은신 아버지는 부셔진 물품들을 참 잘 고치셨으며 실내 장식을 멋지게 하셨던 것도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항상 나의 아버지셨어요. 친척들 모두 내 이름을 넣어서 아버지를 불렀어요. 제 친구들에게는
최고의 부러운 아버지이셨습니다. 언제 와도 빵을 마음껏 주시고 불고기 사주시면서 딸의 좋은 친구가
되기를 고무하셨어요. 말씀도 잘 하셔서 친구들은 해말간 얼굴로 자기들 아버지인양 말씀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동네 이웃, 구멍가게, 포장마차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에게는 특별히 친절하셔서 모두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칭찬했습니다. 언제나 선생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시면서 학생들이 늦게 빵집에
들어오면 빨리 집에 가라고 내보내기도 하셨지요. 경찰서, 소방서와 동사무소 직원들과도 잘 지내시는
사장님이셨습니다. 아버지의 너그러움 덕분에 저의 집은 종로 길목에 위치한, 양가 친척들의 들려가는
쉼터 또는 정거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들린 사람은 누구든 배가 불러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종로 3가에 지하철 공사가 시작된 후로 건널목이 막히고 건물 앞의 땅을 너무 파서 전면이 조금
무너지는 일이 거듭되고 가게 입구 통로를 잘라먹는 바람에 빵의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어요. 결국 빵집은
재고가 없는 찻집으로 변하고 윗층은 세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강남으로 진출하려
하셨지만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엄마가 반대하셨고, 또 가게를 처분하고 여유롭게 지내고
싶어하셨지만 이 또한 엄마의 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집은 종로에서 강남의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의 넓은 새 집으로 옮겼습니다. 이 아파트가 한국의 마지막 제 주소지입니다.
아버지는 그 후 친척이 넣은 주택 청약이 졸지에 당첨되는 바람에 공기좋은 분당으로 재차 이사하셨지요.
부모님은 분당을 크게 즐기셨습니다. 또 종로 3가가 귀금속 지역으로 차츰 탈바꿈되면서 아버지는
은퇴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분당에서 멀리 종로 3가로 자주 나가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종로와
분당의 중간 지점인 양재역의 스포츠 센타의 회원이 되셔서 종로 건물 엄무를 보셔야 하는 날에는 운동을
하시고 주차를 하신 후에 지하철을 타고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국 방문을 하면 양재역
스포츠 센타를 들리곤 합니다. 아버지와 엄마를 따라서 그 건물의 식당과 커피솝에 부지런히
동행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져서 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황금 시기는 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73세에 적립선암에 걸리셨어요. 25년 전에 직장암을 이겨내시고 항문을 바깥으로 빼내는
수술을 받으셨던 분이 두 번째 암의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절대 불평이나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갑작스럽게 대변이 나와서 옆 사람들에게 냄새를 전할까에 대한 걱정을 줄곳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점차로 자연스럽게 변한 분홍색 창자의 끝부분에 맞게 동그란 링을 솜씨있게 만들어 비닐봉지에 끼워서
변의 흐름 관리를 깨끗이 하셨지만 냄새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애쓰면서 열심히 사셨는데...
샤워 중에 우연히 발목이 부은 것을 아시고 의사인 큰아들과 이야기하셨습니다. 림프가 부은 이유는
암의 전이 때문이었습니다. 암이 이미 번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연세가 있어서 암이 천천히 퍼질 것이라고 애써 위로를 했지만 기막히게도 좋은 건강
때문에 전이가 빨라서 발견한지 일 년도 안되어 운명하셨습니다. 기분좋으시면 학창 시절에 하셨던
권투 선수의 빠른 발동작을 날렵하게 가족들에게 보여주셨고, 기억력이 기막히게 좋아서 지난 이야기들을
현재의 사건 처럼 서술하셨습니다. 언제나 좋은 책과 신문 읽기를 열심히 하셨으며, 좋은 글귀들을
메모하셨고, 수 십년 동안 일기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중국, 러시아와 터키의
거대함에 압도되셨으며, 스위스의 융프라우 지역 폭포를 다시 보고 싶어하셨고, 일본인의 친절함을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로망이었던 미국, 딸이 사는 미국 LA를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매 년 한국 방문을 했지만 나이드신 아버지의 속 건강은 챙겨드린 적 없이 아버지의 호의와 사랑과
내 건강에 대한 걱정만을 듬뿍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었습니다.
아버지 가신 후 제 친정은 부셔졌습니다. 크지도 않은 유산 문제로 다툼이 일었습니다. 멀리사는 누나인
저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제게 큰 상처를 주었어요. 두 남동생의 긴 다툼은 모두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아버지의 존재가 아쉽고 말씀이 고맙고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격했던
감정을 극복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니까요. 동생들의 감정도 조금은 가라앉은 것으로 믿지만, 우리 삼남매는
옛날 학창시절의 정감을 나누던 오누이 사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어린시절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만든 이름다운 추억이 많아서 여전히 고국과 친정이 좋습니다.
(아버지는 선산이 광교아파트 개발로 이장을 앞둔 싯점에 돌아가셔서 유언대로 화장을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 앞에 묻히셨습니다. 그 후에 선산은 경기도 광주 시안으로 이장했습니다.)
아버지,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
잠시 아버지 일생의 극히 작은 부분을 회고했습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아버지는 큰 자식이자 하나 뿐인 딸을 믿어주시고 많이 사랑해 주셨어요.
아버지 방에 걸렸던 유일한 사진 한 장은 제 대학 졸업 사진이었고, 후에는 저의 가족 사진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슴이 짠해지며 자존감이 팍팍 일어섭니다.
딸에게 주신 사랑과 관심을 생각하며 저도 그런 사랑과 관심을 제 자식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마주보며 불러보고 싶습니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많이 부족했지만 효녀라고 말씀해 주셨고, 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환했습니다.
하늘에서 편안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세요. 자격이 충분합니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아주 인간적인 삶을 온 힘으로 사셨습니다.
6.25와 아버지날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더 아버지를 그려봅니다.
'My heartfelt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LA 산보길에 핀 화사한 봄꽃들 (0) | 2021.04.14 |
---|---|
2020년 11월과의 이별 (0) | 2020.11.30 |
[열린 광장]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아라 (0) | 2020.02.06 |
2919년 끝에 가진 단상 (0) | 2019.12.30 |
두 개의 이름 (0) | 2019.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