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타운 웨스턴 길의 CGV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의 열기가 너무도 뜨겁다.
감동적이라는 입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떠나온 뿌리 조국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를 원하고 있다. 영화의 주제인 'Ode to my
Father'은 쉽게 이해되었고 스토리와 배우들은 행복을 선사했다. 미국 영화 Forest Gump 처럼 가끔 등장하는 시절을 대표하는
카메오들은 감칠맛을 준다. 정주영, 남진, 나훈아, 이만기, 앙드레김 등등. 23일 부터는 LA 의 한인타운을 넘어서 다른 도시로,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와 뉴욕시를 넘어서 오하이오주, 플로리다주, 미시간주에서도 개봉될 것이라고 한다. 북미 개봉 10일만에
100만 달러 이상을 훌쩍 넘게 벌어들인 외화벌이의 효자다. 입소문은 아주 빠르다.
나도 지난 주에 극장을 찿았다. 울고 웃은 덕분에 126분의 상영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앉았던 좌석 주위의 관객들은 대부분
어르신들이었다. 어떤 노인 단체는 선생님의 인도로 단체로 관람하고 있었다. 영화에는 바로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녹아있었고 내 기억 저 밑에 잠자던 역사적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전개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질 때의 느낌은 아프면서도 너무 좋았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지낸 어르신들은 그렇게 뿐이 살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의의 길은 아니어도 불평없이 열심히 사셨던 부모님 세대다. 희생이란
말에도 서럽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애들을 위해서 표 4장을 예매했다. 미국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그들도 조부모의 노고와 한국의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들 역시 감명깊어 했고
주인공 덕수와 함께 울고 웃었으며 돌아와서 던지는 질문도 많았다. 훗훗...
한국 신문에 광고로 실린 국제시장 영화 포스터이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의 행로에 중요 모티브를 제공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
영화는 6.25 전쟁 중에 흥남 철수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 10군단과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죽기살기의 피난 행렬로 시작된다. 떼로
밀려드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미군 10군단은 흥남에 고립되었다. 철수 중이던 미군은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의 10일 사이에 총
14척의 군함, 화물선, 상선으로 10만명 이상의 피난민을 대피시켰다. 영화 속의 Meredith Victory 호는 마지막 남은 상선이었다.
미 10군단장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의 호소에 장군은 25만톤의 군수품을 버리고 정원 2,3 천명인 배에 14,000 명을 태운 후
부산을 지나 거제도에 도착했다. 이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선박으로 인정되어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고 한다.
주인공 윤덕수는 1943년 생으로 만 7살에 메레데스 빅토리 호에 오르면서 등에 업었던 동생 막순을 잃었고 동생을 찿아나선 아버지
마저 잃었다. 아버지는 막순을 찿기 위해서 하선하기 전에 덕수에게 가족을 부탁한다. 이 때부터 덕수는 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가장이기 때문에 인생의 길을 선택할 시에는 자신보다 식구를 앞에 두고 결정한다. 책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덕수를 더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이라는 호칭은 엄청만 무게를 어깨에 실어준다. 평생 가장인 모든 아버지들의
어깨는 무겁다. 특히 전쟁과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친 남자들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10대에 가장이 된 나의 아버지도 두살
어린 동생의 아버지가 되어서 보살피셨다. 6.25 전쟁은 한국민 모두의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나에게 6.25는 내 아버지의 실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18살 고등학교 3학생으로 연세대 입학이 목표였던 아버지는 전쟁
발발 후 3,4 개월을 숨어 지내셨는데, 북한군에 발각되어서 북한군으로 끌려가는 것 보다는 한국군 장교로의 자원 입대를 택하셨다.
육군종합학교 18기생이 되어서 3개월 정도 훈련을 받고 1951년 2월 10일에 소대장으로 임관하셨다. 1951년 3월부터 6월 까지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용케도 살아남으셨고 전시 후인1960년 12월 20일에 소령으로 제대하셨다. 난 아버지에게
전쟁에 관한 비화와 실화를 무수히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 하셨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얼마나
잔인했던지 그 체험을 듣는 내 입은 항상 쩍 벌어지곤 했었다. 아버지의 사무친 체험은 나의 미국행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너라도
전쟁없는 곳에서 살아라. 그러면 아버지의 피와 살은 남아있는 것이 되니까.' 1954년에 유학생으로 9개월 동안 조지아주의
미육군보병학교 Fort Banning 에서 지내셨던 시절에 각인된 미국에 대한 부러운 기억도 한 몱을 하였다.
* 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민주주의 수호와 국가발전에
기여했다고 2002년 9월 3일에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으로
'참전용사증서'를 받으셨다. 용감하시고 훌륭하신 아버지!
* 아래 사진은 돌아가시시던 해 겨울에 찍으신 사진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아버지의 얼굴을 약하게 덮고있었다.
열심히 사셨지만 암으로 조금 일찍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내 가슴 속에 사시는 언제나 그리운 나의 아버지!
영화의 무대는 제목처럼 부산 국제시장이다. 실제로 국제시장에서, 또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한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아주
잘 보여준다. 윤제윤 감독은 영화가 '부모와 조부모에게 보내는 헌시'라고 말했다. '국제시장은 과거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현재까지 서민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박한 꿈과 희망이 움트는 공간'이어서 선택했다고 한다. 20대에서
70대 까지 60년의 회호리같은 한국의 현대사를 몸으로 맞으면서 살아온 한 남자의 일생은 가족을 위한 희생과 꿈으로
점철된다.
줄거리: 덕수네 가족은 아버지를 잃고 흥남에서 부산으로 피난와서 국제시장에서 외제품 잡화상 '꽃분이네'를 운영하는 고모
가족과 합류한다. 덕수는 동생을 등에 업고 피난민 어린이들을 가르치던 임시 천막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구두도 닦는다.
성장해서는 돈없어서 하고 싶은 공부는 못해도 서울대학에 합격한 남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서독 파견 광부를
자원한다. 서독에서 간호사이던 아내를 만나서 결혼도 한다. 막내 여동생 결혼 자금을 위해서 월남전에 기술자로 떠난다.
월남서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가정은 덕수 덕분에 경제적으로 더욱 안정된다. 피난 중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동생을 찿기 위해서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출현한다. 아버지는 찿지 못했지만 미국으로 입양된 여동생 막순이를
만난다. 세월이 흘러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자녀들은 성장해 손자손녀도 있다. 고집불통 노인이 된 덕수는 외롭다.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엔 아버지가 살아 있다. 아버지는 힘들 때에 위로도 해주신다.
영화 끝에 벽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덕수는 말한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아버지 되게 보고 싶습니더.'
그의 독백은 내가 나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가족의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을 하셨기에 빛나고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들이다.
배 위에서 덕수를 껴앉고 가족을 부탁하는 덕수의 아버지와 부산으로 피난와서 구두닦이를 하는 덕수와 친구 달수다.
한국은 1963 ~1980년 까지 높은 실업율을 완화하고 외화 획득을 위해서 7,900 명의 광부를 파독했다. 첫모집에는 500명 선발에
46,000 명이 지원한 100:1의 경쟁율을 보였다. 독일은 광부 부족 현상을 해소하고 미국이 독일에 요청했던 한국재건 지원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결정했다. 하지만 파독 광부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덕수는 간호사 영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데이트를 한다. 한국의 간호사 파독은 1966 ~ 1976년 까지 만명 정도였다. 시작은
당시 독일 마인츠 대학의 의사였던 이수길 박사의 주선이었다. 간호사들이 매년 송금하던 천만 마르크의 외화는 한국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3년의 계약을 끝내고 독일서 귀국한 덕수를 보고 온 가족이 기뻐한다. 덕수는 몇달 후에 자신을 찿아온 영자와 결혼을 하고
평생 화목한 부부로 사는 기쁨을 갖는다.
여동생 막순의 결혼 자금을 위해서 기술자로 월남전 파병을 지원한 덕수에게 아내 영자는 실망한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삶도
살라'고 애원한다. 그 다툼의 와중에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일어나서 가슴을 손에 얹고 국민의례를 한다. 그 때는
누구나 그래야만 했었다.
기술자로 참전했지만 월남전은 녹녹치 않다. 언제 베트콩이 나타나 총을 쏠지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피해서 일을 해야한다.
달수는 월남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한다.
한국은 국군 31만 이상을 1964년 9월 11일 부터1966년 4월 까지 네번 월남으로 파병했다. 덕분에 미국에게 경제원조 자금을
받았고 이의 일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국군은 1973년에 완전히 철수했다.
1983년 6월에 KBS 방송국은 이산가족 찿기 켐페인을 시작했다. 패티김의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노래가 배경으로
구슬프게 깔리던 이산가족 찿기는 오랫동안 한국민 모두의 눈을 퉁퉁 붓게 했다. 덕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군의 도움으로
바다에서 구해지고 고아원에 맞겨졌다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LA 에 살고 있는- 평생 가슴에 안고 살던 -동생 막순을 만난다.
주인공 덕수처럼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미련하지만 강하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과 싸우기도 하고 받아들이고 살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들이 충실히 살았기에 후손들의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모든 시대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 시대, 저 시대, 이 시대,
모두 마찬가지로 힘들다. 우리는 태어나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시대를 열심히 산 사람은 누구나 칭송과 격려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시장'은 영어 제목 'Ode to my Father' 처럼 나의 아버지에게도 헌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 감동적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준비하신 생전의 마지막 제사상이다. 구정이었다. 명필이시던 아버지는 멋지게 지방을 쓰셨고 아주 정성스레 제물을
상에 올리시고 절을 하셨다. 그 해의 추석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실 것을 아셨던 분 같이 어느 때보다도 아쉽고 간절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조상님들께 잔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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