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네 산보에 나섰다. 초록 색의 익숙한 동네 모습에서 '단풍나무 한 그루'가 훅하고 시야에 들어왔다. LA 의 12월 초 다운 듯하지만, 저물어 가는 가을을 약간 역행한 모습으로 서있는 나무였다. 눈이 부시도록 빨간 옷을 입고서. 다른 단풍 나무들은 잎이 바랬거나 대부분 떨어져 나간 마른 모습이다. 하지만, 이 나무는 여전히 싱싱하고 통통하며, 잎들은 햇살을 받아 10대 처럼 반짝거렸다. 왠지 내 가슴에 밝은 기운이 차오르는 고무된 느낌이 일었다. 지난 달 한국 방문 때, 함박눈으로 온 거리와 빌딩, 자동차와 산과 나무들이 덮여 세상이 그토록 하얗 수 있다는 것을 - 수십년 동안 잃어버렸던 기억을 - 찾았던 것이 상기됐다. 도시 전체를 덮은 하얀 눈과 잿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눈발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빨간 단풍 잎 색이 시리도록 싱그러웠다. 가만히 나무에게 물었다. 나를 환영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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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갔다. 어느 집 마당에 눈 친구들이 서있다. 아~~ 겨울이구나
그러고보니 우리 집에도 창문과 지붕 테두리에 반짝이는 전구를 달았다. 그리고 12월 마다 창고에서 꺼내는 커다란 소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아 거실에 놓았다.
하이, 12월 친구들아~~~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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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상가 길의 스톱 사인들에는 빨간색 리본이 달려 있다. 화려한 장식들 보다 이 세심한 신경씀이 돋보였다. 이 블락에는 동네 사람들, 도시 사람들, 외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상가가 예뻐서, 식당이 많아서, 걸으면 볼 것이 많아서, 항상 붐비는 길이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주말 이른 아침이라 찻길이 조용하기만 하다. 리본 덕에 달리는 사람들이 스탑 사인 앞에서 멈춤을 더 잘 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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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유리창에 자리 잡은 예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트리스마스 트리와 선물 꾸러미들이다. 성탄 나무에 매달림직한 갈랜드(garland)는 별, 캔디케인, 진저 브레드(생강 과자) 등등을 목에 걸고 지나가는 이들을 부른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한번쯤 보라고. 상점 안과 밖을 동시에 품은 쇼윈도우에 비친 내 등 뒤의 파란 하늘이 무척 고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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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자동차 미터기를 본 순간 웃음이 터졌다. 갈랜드로 미터기 몸을 감고 맨 위에는 선물 리본을 달아 놓았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ㅎㅎ 덕분에 주차를 하고 미터기에 돈을 넣는 사람의 마음이 푸근해지거나 아니면 빨리 성탄 선물 구입을 마쳐야 한다는 마음으로 분주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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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방향으로 걷는데 갑자기 사슴이 나타났다. 사슴들은 밤이면 불로 반짝일려나??? 사슴 뒤로는 동물 가족들이 나란히 서있다. 이 집의 장식들은 전부 동물이기는 하지만, 선물을 전하는 객체(사슴)와 받는 주체(동물 가족)의 조화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지나가면서 한번 더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하~~ 귀여운 앙상블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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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에 매달린 빨간 리본 크리스마스 장식은 동화 속의 마을 분위기를 자아낸다. 리본과 워크웨이(walkway)를 따라 줄 선 지팡이 사탕의 어울림이 절묘하다. 문득, 켄디케인을 들고 춤을 추며 램프를 기어 오르는 요정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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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이른 아침에 산보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걷는 길은 한결 같지만 매번 풍경은 조금씩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르다. 걷는 얼굴들, 마주치는 얼굴들, 집들 앞의 모양새와 잔디 색도 변한다. 걷는 나도 어느 날은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 오고, 어느 날은 지쳐서 돌아 온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LA 모습이지만, 내게는 오랫동안 녹아든 12월 어느 날의 평범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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